본문 바로가기
역사

한국역사에서 가장 공이 큰 장수와 장군들

by 로이인랑 2023. 7. 6.
반응형


12 김유신 김유신은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 통일의 1등 공신이자, 당나라를 몰아낸 영웅입니다.

629년에 대고구려 전쟁에 출전, 낭비성 전투에서 홀로 적장을 3명이나 배어내며 무력을 떨친 김유신은 이후 화랑도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신라를 급성장시키는데요. 
660년에는 백제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 땅으로 진격했고, 비록 황산벌에서 계백에게 수모를 좀 겪긴 했지만,

어쨌든 백제군을 쳐부수고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백제의 호흡기를 완전히 떼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662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나라 군대가 갑자기 내린 폭설과 굶주림으로 공경에 처하자, 당나라 군에게 수레로 약 2천 대 분량의 보급품을 전달해주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렇듯 김주신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후세 사람들에게 야속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긴 하지만, 아무튼 그는 3국의 기나긴 항쟁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룬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통일 이후, 신라는 그를 위해 쾌대각간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그에게 선사했고요. 
김유신이 죽은 후에는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전해 왕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구이 양규 2010년 겨울, 고라의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시켜 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전황 속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명장이 등장했으니, 그는 바로 한국사 최강의 게릴라전 달인 양규였습니다.

양규는 전쟁 초기, 고려의 최전방인 흥화진 성에서 일주일 동안 거란의 파산 공세를 막아낸 후, 거란족이 양규를 스킵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리자, 즉시 약 1700여 명의 특공대를 편성, 거란군의 후방에서 매복, 유인, 함정 설치, 고급 부대 습격 등 게릴라전을 펼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양균은 궐안군 6천여 명이 지키고 있던 곽주성을 단 1700기의 병력으로 한 번에 함락시켜, 궐랑군의 중요 보급 거점을 무력화 시켜 버렸고요.

이후 전투 한 번당 수천 명씩의 거랑군들을 죽이고, 다량의 보급품을 빼앗았으며, 그들에게 잡혀 있던 고려 백성들도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그리고 양규 장군은 가실 때에도 예술로 가셨는데요. 
10만이 넘는 거란 성종의 대군과 박구 없이 정면 승부를 벌이셨습니다. 
이 전투에서 양교와 그의 특공대는 많은 백성들을 구출하고는,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날이 저물도록 용감히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장수의 모범을 보여준 양규는, 바람처럼 날랜 유목민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버리고, 마침내 절망적인 전세를 뒤집어 고려를 구해낸 명장이라 할 수 있겠고요. 
게릴라 팀 가산점을 받아 총점 17점으로 9위에 랭크되었습니다. 
8위 안시성

흔히 양만춘이라고 알려진 안시성주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수성전이었던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었습니다. 
안시성주는 휘하에 약 5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는데, 당태종이 쳐들어오기 전, 같은 편인 연개소문으로부터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안시성주가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연개소문은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 턱밑까지 밀고 들어와

안시성주를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의 공격을 큰 무리 없이 막아냈고, 뻘쭈해진 연개소문은 군사를 돌려 평양성으로 얌전히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쉴 틈도 없이 당태종 이세민의 20만 군대가 들이닥쳤는데요.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당시 부패의 기록을 가졌던 무시무시한 정복 군주였습니다.

그는 안시성에 도착하기 전, 고구려의 몇몇 성들을 함락시킨 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정예병 15만을 격파하고, 최고 지휘관들을 포로로 잡는 등 무서운 기세로 진격하는 중이었는데요. 
안시성주는 그런 이세민의 파상 공세를 큰 위기 없이 너무도 안정적으로 막아냅니다. 
이에 약이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안시성의 코앞에 안시성보다도 더 높은 토산을 쌓은 뒤, 위에서 내려다보며 안시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안시성주는 그 토산마저 빼앗아 버리면서 결국 당나라를 좌절시켰습니다. 
마침내 당태종 이세민은 세 달간 지속했던 안시성 공격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전투 장비들을 버려둔 채 당나라로 빤스런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얼마 안 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 역사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고요.

동아시아 고대사의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시성주는 총점 18점으로 7위에 랭크되었습니다.

시립 척준경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진족 군대가 1만 명을 넘으면 대적할 수 없고, 10만 명을 넘으면 중원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런데 척준경은 이런 무시무시한 여진족들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농락하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무공을 떨친 고려의 여포이자 소드마스터였습니다.

과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sbs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세계관 최강으로 나오는 여검객 척사광은 척준경의 후손으로 설정되어 있죠. 
아무튼 1104년 2월, 당시 최악의 벼슬이었던 척준경은 여진과의 전투 중 고려군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총사령관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말과 무기를 달라며 다소 건방진 요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했기에 척준경의 요청은 즉시 수락되었고,

척준경은 홀로 적 기병대를 향해 돌격해 적장 2명의 목을 순식간에 따버리고는 여진군을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척중경은 윤관을 따라 동북 구성 개척에 참가해 믿기 힘든 수준의 전공을 세웠는데요. 
여진족이 견고한 성에서 고려군에 대항하며 버티자, 그는 칼 한 자루와 방패 하나를 들고서 혼자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여진족 지휘부를 향해 돌진,

여진족 추장들과 경호원들을 순식간에 죽여버리고는, 고려군들이 성벽 위로 올라올 때까지 성벽 위를 사수하며 달려드는 여진족들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척중경 한 사람에게 성의 방어 시스템이 무너져, 여진족의 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고요. 
이것 외에도 여진 철기병대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한 윤관을 부하 몇 명과 함께 구출해낸 일이나, 몇만의 여진군이 성을 포위하자

단 몇 백의 기병으로 그들을 무찌른 일 등등 등 사실상 고려 여진 전쟁은 척준경이 하드캐리를 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아무튼, 전쟁이 끝난 뒤, 척준경은 힘센 조력자를 만나 무관으로는 오를 수 없었던 정이품, 문화시랑, 평장사까지 올라 권력의 맛도 보게 되죠. 
하지만 그 힘센 조력자가 하필 훗날 역적이 되는 이자겸이었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그래서 척준경은 말년의 귀양을 가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귀양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아무튼 척준경은 지휘관급이 아님에도 특유의 엄청난 무력으로 높은 점수와 가산점을 받아 7위에 랭크되었고요. 
척준경의 말도 안 되는 무공은 야사나 설화가 아닌 정사, 고려사, 고려사 자료에 확실하게 기록된 것이므로 믿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일지문덕은 영양식이 고구려의 재상으로, 당시 전 세계 최강의 제국이라 평가받던 수나라군 130만 명의 침략을 단 번에 격파해 버린 엄청난 명장입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수나라 육군이 출발하는 데만 무려 40일이 걸렸고, 그 행렬의 길이가 960리에 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1천여 척의 배를 동원해, 오만의 군사들을 대동강가에 상륙하도록 하여, 곧장 평양을 압박하는 양동 작전까지 벌이죠.

반면, 당시 고구려의 병력은 많게 잡아도 20만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다가, 그마저도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울진 문덕은 수나라군을 한동안 요동 방어선에 묶어두었고요. 
수나라가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35만의 별동대로 곧장 평양을 향해 치고 내려오자, 을지문덕은 그들과 지금의 청천강 유역인 살수에서 전투를 벌여

순하라군 35만을 완전히 전멸시켜 버리죠.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순아라군은 불과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바닷길을 이용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던 수나라의 수군도, 고구려 기병 단 500기에게 5만 명이 모조리 썰려나가는 구력적인 패배를 당했는데요. 
이렇게 육군과 수군이 모두 괴멸된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나라의 패배는 서양 학자들도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꼽는 대사건이었고요. 
수나라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다가 얼마 안 가 멸망하게 됩니다. 
한편, 을지문덕 장군은 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요. 
서울 중구의 번화가에도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유래가 참 흥미로운데요. 1946년, 중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거리에다 중국인들의 길을 누르겠다는 의미로 을지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8월,

대한민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군사훈련의 명칭인 을지프리덤 가디언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또한 국군 제12보병사단의 이름도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부대라 불리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군들도 을지문덕 장군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5위에서 1위까지의 순위는 2편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위, 유근필.

유근필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가장 아끼고 의지했던 장수임과 동시에, 수백제의 견원이 가장 두려워하며 경계대상 1호로 삼았던 장수입니다. 
사실 왕건이 견원에 비해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유군필이라는 명장을 가졌기 때문이었죠. 
누군필은 왕건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를 구출해준 보디가 되었습니다.

925년, 유군필은 왕건이 견훤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후백제의 영토를 약 200km나 뚫고 달려가 왕건을 구해줬었고요. 
928년에는 견원에게 2연패를 당하고 도망치고 있던 왕건을 구출해주기도 합니다. 
그때 왕건은 이미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주변의 호족들에게 배신까지 당한 상태였는데요.

유군필이 왕건을 발견했을 당시, 왕건은 일반 백성의 옷을 입고 머리까지 풀어헤친 상태로 처절하게 도망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근필은 후백제와의 굵직한 싸움마다 구원 투수의 역할도 톡톡히 해주는데요.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였던 고창 전투에서는, 후백제에 비해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맨 앞에서 직접 돌격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단장이 맨 앞에서 돌격을 한 거죠. 
결국 고창 전투는 유군필을 믿고 다 같이 돌격한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고요. 
후백제는 무려 8천 명의 전사자를 내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고창 전투로 유군필은 일약 고려군의 영웅으로 떠올랐죠. 
그런데 유군필에게 갑자기 유배령이 내려졌습니다. 
유군필이 유배를 가게 된 곳은 서해에 위치한 곡도라는 섬이었는데요.

그의 급성장을 견제하려는 호족들로부터 모함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금필은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잊혀질 뻔했죠.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후백제의 수군이 쳐들어와 고려 수군의 배들을 모두 격침시키고는 개경의 앞바다까지 장악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대로는 고려의 해상 무역이 꼼짝없이 봉쇄당할 위기였죠.

그런데 유금필이 유배지인 곡도에서 해안가의 사람들과 선박들을 긁어 모아 중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명장 유금필이 군대를 모은다는 소식은 서해안의 골들과 해적들에게까지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육군필은 순식간에 고려 최초의 의병장이 되었죠. 
그리고 유근필은 결국 그 급조한 군대를 지휘해서 후백제의 정의의 수군을 격파해버리는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둡니다.

이 소식에 감탄한 태조 왕건은 다시 유군필을 불러들여 대장군에 임명했고요. 
유군필은 대장군이 되자마자 쉴 틈도 없이 후백제에게 공격받는 신라를 구원하러 떠납니다. 
근데 유금필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데려간 숫자가 고작 기병 80명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그 80명의 군사들을 귀신 부리듯 하며 승리를 거뒀고, 그 과정에서 후백제군의 지휘관을 둘씩이나 사로잡습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봤을 때, 만약 유은필이 없었다면, 왕건은 진작 견원에게 잡혀서 죽었거나 그의 신하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활약은 전설적인 것이었습니다. 
한편, 유금필을 지극히 아꼈던 왕건은, 죽기 직전에, 유근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등용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하고요.

실제로 유근필의 자손들은 죄를 짓고도 수차례나 등용되어 벼슬길에 오릅니다. 
이렇게 태조 왕건의 구원 투수이자 4번 타자였던 유근필은 총점 21점으로 한국사 명장 순위 5위에 랭크되었습니다. 
4위 강감찬

926년, 거라는 특유의 엄청난 기동력과 전투력으로 발레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일약 동북아의 패자로 올라섭니다.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은 군사 강국 발레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죠. 
이후 거라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수십만의 군대를 항시 유지할 정도로 더욱 강력해지고 업그레이드가 되었고요.

사실상 유목민 기병 한 명이 농경민족 보병 10명을 능가한다는 말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파워는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들은 그 무시무시한 칼날을 고려로 돌렸죠. 
하지만 고려에는 명장 강감찬이 버티고 있었는데요. 
그는 제3차 고려 거란 전쟁의 총지휘를 맡아, 거란군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듯 하며 그들에게 악몽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강감찬은 첫 전투인 흥화진 전투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작전을 성공시켰는데요. 
거란군 주력 부대를 유인해 목표 지점으로 정확히 끌고 온 다음, 둑을 터트려 수공을 펼치는 동시에,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호위 공격을 퍼붓도록 했죠. 
이 기가 막힌 공격으로 거란군 주력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멘탈이 나간 거랑군은 수도인 개경을 향해 곧장 치고 내려왔는데요.

강감차는 아주 침착하게 퓨야의 장수들인 강민첨, 김종현 등을 시켜서 거랑군의 후미를 계속 타격하며, 복음로까지 끊어버리죠. 
결국 거란군은 강감찬의 집요한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말머리를 돌렸고요. 
거란 땅으로 돌아가던 중, 드디어 죽음의 땅, 귀주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감찬이 전국에서 모아 만든 20만의 군사들이었죠. 
거랑군은 많게 잡아도 약 8만 명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강력한 유목민 기병이었기에, 결코 수가 적다고 엿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죠. 
그래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한참이나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며 결판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는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죠. 
하지만 강감찬은 이미 치밀한 작전을 준비해 둔 상태였고, 곧 거암군의 후방에 고려의 1만 기병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저 없이 거란군의 진영으로 쇠도했고요. 
거란군은 그대로 무너져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죠. 
이것은 마치 서양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부르는 전술과도 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살아 들어간 거란군은 불과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고요. 
이렇게 강감찬의 완벽한 전쟁 운영으로 큰 피해 없이 전쟁을 마친 고려는 이후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라 약 200여 년간 평화를 누렸고요.

주변국 백성들이 앞다투어 귀순을 하고, 송나라와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를 하는 등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이렇듯 거란이라는 강력한 적을 상대로 결전을 벌여 큰 피해 없이 적을 격퇴하고, 고려의 황금기를 가져다 준 명장 강감찬은 총점 23점으로 4위에 랭크되었습니다.

3위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임진왜란으로 망할 뻔했던 나라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입니다. 
그는 다소 늦은 나이인 32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북방에서 여진족과 수차례 전투를 치렀는데요. 
수십 명의 병력으로 천 명이 넘는 적을 막아내는가 하면, 여진족의 족장을 직접 사로잡는 등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초고속 승진을 했고요.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마치 실전 같은 빡센 훈련을 시켰는데요. 
벌어는 죽고, 다치는 병사들이 있을 정도라서 원성도 꽤나 들었다고는 하지만, 이 덕분에 실제 임진왜란에선 이순신 부대의 사상자가 독보적으로 가장 적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노련한 왜군들에게 대부분의 조선군들이 처참하게 패배하던 와중에, 이순신의 수군은 반대로 그들을 압도하며 모든 전투를 승리했던 것이었죠.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은 많이들 아시다시피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입니다. 
이 중 하객진으로 대표되는 한산도 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인데요.

유인, 반격, 호위, 선멸 작전을 물 흐르듯 펼치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육지에서도 이 정도의 전술은 성공시키기가 힘든데, 이순신 장군은 그걸 바다에서 해내신 거죠. 
한산도 대첩 후, 이순신 장군은 행주산성에 화포와 보급품을 수송해 주는 보급작전까지 성공시키시면서 권율의 행주대첩에 큰 기여를 하신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나왔던 명량 해전은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성과 싸워 이긴 전투인데요. 
이 전투의 핵심은 이순신 장군이 대장선 단 한 척으로 수십 척의 적선과 한 시간을 넘게 싸우며 버텼고, 이에 용기를 얻은 다른 배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우면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는 수백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수만 명의 왜군들을 남해 바다에 수장시키셨죠.

비록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님은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시고 마셨지만, 그는 나라를 지켜낸 최고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습니다. 
한편, 이 영상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3위에 랭크 되셨는데요. 
점수 산정 기준이 달랐다면 당연히 1위에 랭크 되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상에선 개인의 무력 부분에서 약간의 감점을 받으셨어요.

그 근거를 조심스럽게 말씀 올리자면, 난중일기 등의 사료에서 이순신 장군님의 활 명중률은 84% 정도로 특출난 실력은 아니셨던 걸로 나타나고요. 
무과에서는 급제자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하셨다는 기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무용담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개인의 무력은 조선 장수들의 평균 정도 수준이었다고 보여지기에,

아쉽게도 이순신 장군님은 3위에 랭크 되셨습니다. 
2위 이성계

태조 이성계 하면 조선을 건국한 왕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사실 그의 진짜 모습은 통솔, 무력, 지력, 정치력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강의 명장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장군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고려 말기였는데요.

이 시기 중국에선 홍건적이 때로 일어나 고려로 계속 침공해오면서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하는 사태까지 일어났고, 남쪽으로는 외구가 1년에 20번씩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완전히 활보하고 다니면서 사실상 지금의 남한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원나라의 군벌 세력들과 여진족들도 고려의 북쪽에서 약탈을 벌이며 많은 고려인들을 납치해다가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었죠.

이런 헬조선 지옥불 반도 난이도가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하니, 역사이키는 개인적으로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매우 감사히 여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튼 당시 고려의 무인들 대부분은 성에 틀어박혀 수비전을 펼치거나, 밖으로 나가더라도 게릴라전 위주의 전투를 했는데요. 
클래스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이성계는 적이 있는 곳이라면 일단 찾아가서는 먼저 베라라는 큰 나팔을 불어

이렇게 애들아, 형 왔다라고 알린 뒤, 먼저 선방을 날려 적들을 쓸어버리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이성계가 이끌던 부대는 가별초라는 기병 부대였는데요. 
보통 1천 명에서 3천 명 정도씩 데리고 다녔습니다. 
내 한 마디만 나갔어 죽지 말라. 그리고 이 가별초는 고려인과 여진인, 몽골인까지 합쳐진 다민족 부대였는데 이성계에게 패배한 적장들이 무슨 포켓몬 수집당하는 것처럼 이성계 밑으로 줄줄이 딸려 들어왔기 때문에, 가별초 내에는 용맹한 장수들도 많았다고 하죠.

훗날 중국을 통일하는 청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 할아버지인 아이싱, 기어로, 먼터무도 이때 이성계의 부하였습니다. 
또 이성계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용장이었는데요 일반인은 당길 수조차 없었다는 높은 장력에 강궁을 사용했습니다. 
그 화를 본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것은 인간이 다룰 물건이 아니다라며 감탄했다고 하죠.

그런데 심지어 이성계는 그 화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백발 백중의 실력까지 보여주었는데요. 
예를 하나만 들자면, 외부와 전투를 하기 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180m 거리에다 투구 하나를 두고 세 발의 화살을 쏴서 모두 명중시켰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사기가 오른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해 왜구들은 완전히 묵사발이 났다고 하죠. 
그리고 이건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만주 일대를 장악했던 원나라 군벌 나주 세력과의 싸움에서는 나주가 장수들을 한 명씩 보내 이성계와 1대 1 대결을 시켰는데, 그들 모두가 차례차례 이성계에게 죽자, 이번엔 동시에 5명의 장수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이성계가 모두 한 큐에 사살해 버렸죠.

이 모습을 지켜본 나추의 부인은 평생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싸우지 말고 피하십시오라고 했다는데요. 
나츠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모든 군사를 휘몰아쳐 던졌다가 이성계에게 완패를 당하고 맙니다. 
이것 외에도 이성계에게 그게 사람이냐라고 할 정도의 무용담들이 아주 많은데요. 
이 영상에서 다 소개해 드리긴 어려워서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듯 이성계는 무려 30년간 주변의 모든 세력들과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여 항상 완승을 거둔 히데의 먼치킨 급 명장이었고요.

마지막에는 고려를 전복시키고, 자신의 왕국인 조선을 건국하는 업적까지 세우며, 한국사 명장 순위 2위에 랭크되었습니다. 
1위 고담덕 광개토 태왕 한국사회에서 독보적인 정복 군주로 평가받는 광개토 태왕은 유년기부터 몸집이 크고 생각이 대범했다고 하는데요

10대 중반인 태자 시절, 혼자서 호랑이를 사냥해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매우 용맹했다고 합니다. 
그는 17세에 왕위에 오른 이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3년간 정복 활동의 모든 힘을 쏟아냈는데요. 
고구려와 이웃한 거의 대부분의 세력들과 전쟁을 벌여, 그저 그런 산악국가였던 고구려를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공개토 태왕은 즉위하시자마자 겨우 17세의 나이로 백제를 공격하는데요. 
당시 백제는 한반도에 패권을 쥐고 있던 국가로서, 고구려보다 인구도 많고 생산력도 높았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은 천재적인 용병술로 순식간에 백제의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상관과 임진강의 주도권을 빼앗아 왔죠.

당시 백제의 왕도 꽤 능력이 있는 왕이었지만, 전쟁의 천재였던 광개토 태왕에게 정신없이 털리고 난 뒤, 귀족들의 신뢰를 잃으면서 안타깝게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건, 광개토 태왕이 백제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거란족과도 동시에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는 사실이죠. 
당시 거라는 인구 35만에 달하는 큰 유목민 세력이었음에도, 진격의 강개토 태왕님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왕께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전선에서 전쟁을 하셨는데요. 
이게 진짜 대단한 건 게, 당시 고구려는 하나의 적과 싸우기에도 벅찬 국력을 가진, 딱 그 정도의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미국 같은 슈퍼파워는 아니었으니까요. 
이후 계속 공격해오는 백제를 최소한의 병력으로 격퇴하는 동시에, 요동 지역의 비려, 또한 적은 병력으로 정복하는 데 성공한 광개토 태양은 비려로부터 엄청난 것을 빼앗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주에 있는 거대한 소금 밭이였죠. 
당시 소금은 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금으로 따지면 유전을 빼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소금밭 외에도 유목민적인 비려와 거란을 토벌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가축대와 함께 풍부한 철광산지도 확보하게 되면서, 광개토 태왕은 정복을 위한 충분한 경제력까지 거머쥐게 되시죠. 
이후 자꾸 집쩍거리던 백제를 제대로 손봐주기 위해 직접 수군을 이끌고 한강 이남에 상륙한 광개토 태양은

군사를 몇 갈래로 나누어 입체적으로 운용하시면서, 단 시간에 무려 58개의 섬과 700개의 마을을 정복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당시 백제의 아신왕은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저는 영원토록 태양의 녹객이 되겠습니다. 
백제왕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광개토 태왕은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갑니다. 
하지만 백제의 아신왕은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구려에 복수하기에 앞서 먼저 힘을 키우기로 하죠. 
그래서 백제의 아신왕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가만히 있던 신라를 정복하려고 합니다. 
당시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이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요. 
결국 광개토 태왕이 신라를 도와주시죠.

당시 백제, 가야, 야마토 연합군은 병력도 많고 철갑으로 무장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대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광개토 태양의 오만 철갑 기병대는 그들을 거의 일방적으로 완전히 갈아서 뭉개 버리며, 남해안까지 진격합니다. 
이로써 백제의 연합군은 무너지고, 나라를 되찾은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밑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하지만

백제는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고 왜를 끌어들여 지금의 황해도를 공격합니다. 
이에 강개터 태양은 직접 군사들을 지휘해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버리시죠. 
그 뒤에도 근성의 아신왕은 또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병사들을 모으지만,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신라와 일본으로 대거 도망쳐버리면서 그만 주저앉게 됩니다. 
근데 제가 아까 광개토 태왕이 동시에 두 군데에서 전쟁을 하셨다고 했죠?

네 광개토 태왕은 백제와 싸우는 와중에 선비족의 정복 왕조인 연나라와도 전쟁을 하셨습니다. 
처음엔 최소한의 병력으로 수비를 하시다가, 백제를 주저앉힌 다음엔 공격으로 전환하셨죠. 
연나라도 광개토 태양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개토 태양의 끊임없는 공격에 서서히 무너져, 요동부터 요서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빼앗겼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의 베이징에 있는 유주 지역의 책임자가 고구려로 귀순합니다. 
이후 광개토 태양은 수연의 수도까지 진격하셨고요. 
결국 후연은 반란이 일어나면서 멸망하고, 그 자리엔 북연이라는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새로 세워진 북연에서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 바로 고구려 왕족 고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광개토태왕은 공격을 멈추고, 그를 같은 집안 사람으로 인정해 주면서, 북연도 사실상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오게 되죠. 
그리고 광개토 태왕께서는 우리 민족사에서 기념비적인 역할도 하셨는데요. 
한국사 최초로 연호인 영락을 제정하시고 중국 중심이 아닌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으로 천하를 바라보셨습니다. 
이렇듯 2위를 기록한 태조 이성계처럼 사방의 모든 적들과 싸워 이긴 광개토 태양은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엄청난 영토 확장까지 이루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점에서 동방의 알렉산더라고까지 평가받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은 이렇게 총점 29점으로 1위에 랭크 되셨습니다. 
이것으로 한국사 명장순이 탁 태는 막을 내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