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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나폴레옹은 어떻게 권력을 차지했나? 프랑스 대혁명과 연계하여 설명드립니다.

by 로이인랑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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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사에서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그리고 가장 고강도로 벌어진 전쟁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신분제가 깨어지고 전 유럽의 자유주의를 심어주게 됩니다. 
18세기에 벌어진 전 지구적 사건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유권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이끌었고 정복전쟁을 통해서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죠. 
누군가는 전쟁 영웅 누군가는 독재자라고 부르는 나폴리 그가 벌인 이십 년 간의 전쟁이 어떻게 세계 질서를 엎었으며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폴레옹에 대한 모든 것 지금 바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세상의 모든 전쟁사를 읽어드리는 전쟁사 읽어드립니다의 역사학자 임용환입니다. 
나폴레옹은 35세에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40세에 전 유럽을 장악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이 되느냐

나폴레옹의 출생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 년만 먼저 태어났어도 이탈리아 사람이 될 뻔 했죠. 
아마 이탈리아 사람이 됐으면 우리가 아는 나폴레옹은 없었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인데요. 코르시카 섬은 원래 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속령이었습니다. 
코르시카 사람들은 제노바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했는데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직전인 1755년에 코르시카에서 커다란 봉기가 일어납니다. 
이때 지도자가 파울리라는 사람인데

그는 코르시카 섬을 대부분을 차지하고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그때 제노바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고 귀찮다 그래서 진압하는 대신에 프랑스에다 팔아버립니다. 
이렇게 되니까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침공하게 되죠. 
파울리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와 싸웠는데 결국 패배하게 되고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파울리의 비서로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폴레옹을 인태해서 출산을 하게 되죠.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쟁 속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파올리가 영국으로 망명하는 배에 오를 때 아버지가 안 가겠다고 그럽니다. 
그리고는 바로 프랑스 편으로 전향을 해버립니다. 
사실 나폴레옹 집안은 십사 세기에 피렌체에서 이주해 왔는데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귀족이 아니라 향미 정도 되는

그런데 이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당신을 귀족으로 인정한다는 임명장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 가분이 친 프랑스 집안으로 포르시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아무튼 나폴레옹 집안은 대대로 이제 법률가 가문이어서 아버지 역시 변호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전통적으로 군인 집안이었는데 어머니가 사실 굉장히 오했어요. 
나폴레옹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들 얘기를 합니다. 
나폴레옹의 성장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학창시절입니다. 
천7백7십팔년 십이월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유학을 떠납니다.

그래서 천7백7십구 년 5월에 브리엔의 군사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브리엔 군사학교라고 하지만 군사 교육은 거의 안 받았어요. 
대부분 귀족 자제들이 군 장교가 되기 때문에 군인대를 지휘하는 데는 일반적인 리더십 교양 이런 게 있으면 된다 그래서 군사학교가 실제로 일반 학교와 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의 군사 기술은 요즘 우리가 아는 사관학교를 나오고 전문적인 군사 기술을 익혀야만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군대는 바뀌어가고 있는데

관념과 교육 시스템은 느리게 변하고 있었던 거죠. 
사실은 이것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유럽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귀족 장교들이 무수히 도태되고 무능해지는 결정적인 요인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 령이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나폴형이 코르시카에서 귀족이라지만 프랑스 본토 귀족들이 보면 뭐랄까요. 
그냥 재산이라든가 노는 규모가 달라요

그러다 보니까 예를 들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러는데 나폴레옹은 돈이 없어서 그 자리에 어울릴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이탈리아도 아니고 코르시카 사투리 이탈리아를 썼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평생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그런 걸로 삐뚤어졌으면 나플령이 못 했겠죠. 
학창 시절에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겨울이 되니까 눈이 내렸습니다. 
군사학교잖아요. 선생님이 운동장에 내놓고 편을 나눠서 눈싸움 시합을 붙였습니다. 
이때 나폴레옹 편이 몰리게 됐어요.

그러자 갑자기 나폴레옹이 탁 나오더니 내가 지휘하겠다. 
절반은 눈덩이를 만들고 절반은 던져라 적을 공격할 때는 두 명 세 명이 한 팀이 돼서 한 명을 공격해라 분업 집중 지동 이런 원리를 이용해서 눈싸움을 승리로 거뒀었다.

저도 어릴 때 이 얘기 듣고 감동 받아서 눈싸움 할 때마다 전략 짤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사실 이 이야기도 신빙성이 좀 낫다고 든 그래요 근데 솔직히 여러분 이건 좀 짚고 넘어가야 되는데 나폴레옹이 워낙 관심을 많이 받아서 나폴레옹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이 천오백 명이 넘는데 그 중에는 적도 있고 추종자도 있고 잠깐 스쳐갔던 사람도 있고 뭐 정부도 있고 별 몇 사람이 다 있는데 그 사람들의 일화가 또 맞다고 해서 볼 수도 없는 그래서 나폴레옹의 일화는 만들어 낸 것도 되게 많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냥 옛날 이야기 듣듯이 이야기는 좀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중요한 거는 나폴레옹이 어릴 때부터 강한 야심과 성취역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나폴레옹의 학업 성적이 또 이게 재밌는데 선생님이 쓴 평가서를 보면 수학은 우등생이다. 
이건 굉장히 나중에도 중요합니다. 역사와 진리는 보통이다. 
음악 댄스 사교 이런 거는 다 못했다. 
근데 이제 그 다음에 재밌어요. 굉장히 순정적이고 온화하다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훌륭한 해군 감이다라고 적었어요. 
이게 이제 모든 전기학자들의 미스터리인데 나폴령은 전쟁할 때 해군은 정말 꽝이었습니다. 
해군 때문에 망했는데 이 위대한 육군 지휘관을 왜 해군이라고 그랬을까 당시에 해군 생활이라는 게 굉장히 힘들잖아요. 
배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꿋꿋하게 버텨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애가 힘든데 외토인데 꿋꿋하게 잘 버틴다 생각해서 훌륭한 해군감이라고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해군이 아니라 육군으로 발휘하게 됩니다. 
천칠백팔십4년 1월에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파리 육군사관학교는 4년 과정인데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리고 집 안에 가난이 닥치죠

아버지의 죽음이 나폴 내용을 뭔가 바꿨던 것 같아요. 
돈이 없잖아요. 여기서 나폴 내용이 각성하고 공부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단 1일 개월 만에 조기 졸업을 하게 됩니다. 
나폴링이 이렇게 열심히 했던 거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계가 끊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정부에게 생존에 큰 빚을 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째 둘째 아들이지만 큰 아들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가장이 돼서 빨리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그러니 빨리 장교 인관을 받아서 월급을 받아서 가족을 부양해야 된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장교가 되는 중에도 가장 힘든 포병장교 임용시험을 준비합니다. 
합격자 겨우 8명인데 그중에 42등으로 합격했어요. 
성적이 낫지 않냐 다른 사람들은 3년 4년 공부하고 붙은 거고 일 년 과정 마치고 붙은 거기 때문에 절대 낮은 성경이 아닙니다. 
나폴리 이걸 왜 포병을 지원하느냐

귀족들은 낙하산으로 가요. 귀족들은 어디를 제일 선호하느냐 기병을 제일 선호합니다. 
말타고 폼 잡을 수 있잖아요. 군복도 달랐어요. 
여러분 영화에서 보시는 단추 많이 달리고 여기 레이스 막 달린 거 이 뜻이 뭐겠어요. 
관리하기 힘들어요. 옷이 그러니까 옷값도 많이 들고 단추 채워줄 사람이 있어야 되고 단추 떨어지면 달아줄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근데 포병이나 공병은 몸으로 일해야 되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게 포병하고 공병입니다. 
왜 흙더미에서 망치질하고 대포 밀어야 되니까 그런데

당시에 전쟁을 뒤엎는 가장 강력한 화력이 포병이에요. 
그러면 포병장교에 임용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뭘까 물리학과 수학이죠. 
이게 쏠려면 탄도학 계산하고 이런 거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돈 없고 실력 있는 애들이 포병으로 몰렸던 겁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수학 정말 잘 했거든요. 
자기가 수학을 이 정도로 잘한다고 자랑한 글이 있는데 제가 원래 슈퍼자잖아요. 
그래서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여간 수학 잘했어요.

하 그리고 굉장히 우등생 실력이었고 소병학교 가서도 성적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천칠백팔십오 년 구월 나폴레옹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소유로 인관됩니다. 
자 이때부터 나폴랭의 군인 생활이 시작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절의 나폴레옹은 장교로서의 어떤 역할이나 뭐 이런 게 전혀 없습니다. 
적은 월급으로 가족을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급여 대부분을 가족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본인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렵게 살았고 하도 비실비실하게 살아서 자기가 하던 단골 식당 아주머니가 커피는 공짜로 줬다고

이때부터 굉장히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냥 많이 읽는 정도가 아니라 노트로 정리하고 논문도 쓰고 자신의 직접 훈련을 시작을 합니다. 
나폴레옹은 독서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52년을 살아가는 동안 무려 8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고 포화 속에서 5만 권의 책을 싣고 다니면서 마리에서까지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명의 포병 장교였던 나폴레옹 그가 어떻게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프랑스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사실은 세계사를 새로 쓰게 만든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죠. 그러면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변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묘사한 유명한 그림입니다. 
늙고 가난한 농부가 자기보다 훨씬 기름지고 뻔뻔해 보이는 성직자와 귀족을 비틀거리며 업고 가고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 중에서 귀족은 1.3퍼센트인 3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프랑스 토지의 이십오 퍼센트를 소유합니다. 
성직자는 전체 인구의 0.5퍼센트인 12만인데 토지의 10퍼센트를 교회가 소유했습니다. 
여기서 벌써 많은 느낌이 오시죠

평민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귀족과 성직자가 내지 않는 세금을 내고 각종 부역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신분제와 불공평한 과세 제도를 타파하고 자유 평등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발생한 사건이 프랑스 혁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프랑스가 두 가지 큰 실수를 한다 첫째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비라는 게 엄청난 돈이 드니까 이제 일단 돈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영불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영불 통상조약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공업이 발달한 영국이 프랑스에다가 공업제품 수출하고 곡물이 넘쳐나는 프랑스가 영국에 곡물을 수출한다 굉장히 좋을 것 같은데 공업이라는 것이 가지는 부가가치와 이윤과 곡물이라는 게 가지는 부가가치 이윤이 다르잖아요. 
이렇게 되니까 프랑스 농민들은 곡물을 싼 값으로 판 다음에 비싼 공업 제품을 수입해서 이걸 또 써야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무역 역조라고 할까 이런 현상이 발생해서 국가 재정은 더 파탄이 난다는 여기에다가 루이 14세 이후로 왕실의 지속적인 사치 낭비 때문에 빚이 점점 늘어난다 루이 16세가 주기한 천7백7십사 년에 국고 빚이 약 15억 리브르였는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천칠백팔십구 년엔 무려 세 배로 늘었다.

이렇게 돼서 국가는 파산 지경은 되고 어떤 분은 말하기를 혁명 직전에 프랑스는 세금을 내는 사람은 없고 돈을 받기만 바라는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루이 16세도 여러 가지 재정개혁을 하려고 하지만 특히 성직자와 귀족들은 세금 내는 걸 거부하고 뭐 이런 저런 개혁안들도 다 실패하면서 결국 혁명이 터졌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로 터졌던 문제가 뭐냐 룰이 16세가 제정 문제를 일단 해결해야 하니까 1614년 이후로 개최되지 않았던 3부회를 소집합니다.

의회는 표결로 해야 하는데 제3 신분이 훨씬 수가 많아요. 
세삼 신문들은 이 기회에 가서 우리가 권리를 얻자 라고 하고 왔어요. 
본건적 특권을 폐지해라 그래야 우리가 세금 내겠다. 
왕은 그런 건 건드리지 말고 그냥 세금 어떻게 낼지만 얘기해 이렇게 되니까 당장 붙어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분별로 심의에서 표결해라

그러면 2대 1이잖아요. 그러니까 제3 신부들은 그런 게 어디 있냐 전체 투표로 해서 다수결로 하자 이렇게 말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싸움이 나기 시작하는데 평민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국민의회라는 걸 만들어 버립니다. 
문제는 여기에 진보적인 귀족과 성직자도 가담해 버린다는 거죠. 
이게 뭘 말하냐면 이미 사회는 변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서 유명한 선언을 하죠. 동의 없이는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 
권리 없는 곳에 증세 없다. 이런 말이 터져 나옵니다. 
화가 난 루이 16세가 국민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회의당을 폐쇄해버립니다. 
그러자 평민 대표들이 테니스 코트로 이동해서 헌법을 제정하고 이루어질 때까지 국민의회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죠.

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걸 해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민중들이 봉괴해버리죠 국민 의회를 보호하고자 파리 시민들이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됩니다. 
왜 하필 바스트를 공격했냐고 그러는데 베르사유로 가면 되잖아 저도 어릴 땐 이유를 몰랐는데 베르사유가 파리에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기차 타고 지금도 한참 가야 돼요

그러니 베르사유까지 가기 힘드니까 다른 곳을 공격해야 하는데 바스티유는 원래 요새였다가 감옥에 됐던 곳인데 주로 정치범 수용소였어요. 
그러다 보니 독재 정권 중세 권위의 상징 이런 게 돼버린 거죠. 
이제 아이러니한 거는 당시 바스티유는 정부에서도 이제 감옥으로 안 쓸려고 폐쇄 중이어 가지고 정치범은 하나도 없었고 재수도 일곱 명 밖에 없었어요. 
근데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저 성벽 안에 누가 있는지 알게 뭐야

수비대도 별로 형편 없었기 때문에 바스티유는 함락되고 이것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바스티유 습격 소식을 들은 루이 십육세는 정말 깜짝 놀라죠

루이심서는 굴복하게 되고 국민 외에는 구 악법들의 폐지를 포고하고 새로운 헌법의 작성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새 헌법의 정신을 담은 기본 권리인 프랑스 인권선언을 공표합니다.

그런데 여기가 성공하자 아무도 몰랐던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삼부해라는 게 귀족 성직자 제3신분인데 이 제3 신분이 뭐냐 하는 건 당시에 솔직히 아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다 인권 선언을 하고 모든 사람의 이해를 보존하고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고 기존의 악법을 제거한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제3 신분이라는 덩어리 속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갑자기 민중이 자신을 자각하면서 엄청난 이해관계가 터져 나오게 돼

어떤 역사학자는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민중이 자신이 가진 힘을 최초로 깨달았다. 
그런데 그것을 통제하던 질서는 없어지고 그 힘을 어떻게 행사할지도 몰라요 이처럼 자기 이해관계가 달라지니까 자기가 원하는 걸 실현하는 방에서도 방법이 달라지게 돼요. 
10월 5일에 파리 군정이 베르사유 군까지 행진하죠.

그러자 루이 십육세는 이제 더 한 단계 더 항복을 해서 자기가 국민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좀 서로 타협하면서 절충으로 가자는 사람과 무슨 소리냐 그냥 한 방에 만들자 이러는 급진파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죠. 
혁명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이 와중에 두 가지 큰 사건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왕당파라고 하는데 귀족 성직자 이런 사람들은 무슨 민중혁명의 시대가 오는 것 같으니까 당연히 외국으로 도주하게 되죠. 
그 사람들 도주하는 건 사실은 환영했어요. 
잘 가라지 뭐 당신 저택 우리가 접수해서 행복하게 살게 이렇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누이 십육세가 프랑스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왕이 우리를 버렸다. 더우기 이때는 주변에 외국 군대들이 프랑스 혁명이 나니까 이 혁명을 막겠다고 공격해 들어오던 상황이었거든요.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왕이 우리를 버리고 적국으로 튀었단 말이에요. 
이것은 지금 절충과 타협을 이야기하는 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데미지를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층 부르조아나 귀족들하고 타협을 하고자 했던 국민의회은 루이 16세 왕권을 계속 유지하자고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1791년 9월에 이헌 군주제를 기초로 한 헌법을 공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먹힐 리가 없잖아요. 왕정 폐지 세력들이 크게 단합하면서 혁명세력이 분열하게 됩니다. 
좌파 우파라는 용어도 사실 이때 생겼습니다. 
당시 국회에서 모이는데 원래 다 끼리끼리 앉잖아요. 
급진파는 왼쪽에 앉고 온건파는 오른쪽에 앉아서 급진파를 자파 온건파를 우파라고 부르는 용어가 탄생했습니다.

급진파는 점점 힘을 얻으면서 루이 16세가 있던 튈르리 공을 습격해서 스위스 수비대를 학살합니다. 
그리고 국왕을 체포해서 수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민중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또 한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데 마침 나폴랑이 그때 파리에 있었어요. 
전투에 참전한 게 아니라 사건이 난 다음에 튈르리 궁에 갔는데 학살 당한 스위스 수비대의 시신들을 보게 됩니다.

어마어마하게 끔찍한 광경이 있었어 사람들이 몰려와서 옷 같은 거 벗겨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 놈들 나쁜 놈이라고 절단을 하고 난도질을 하고 어디 잘라서 기념으로 가져가고 어떤 정규 작가들은 이때부터 나폴레옹이 민중을 혐오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루이 16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이 루이 16세의 운명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의 운명도 영향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죠. 
나폴레옹이 그 틸리르 궁전 앞에 구경간 거 한 번 밖에 없는데 대체 어떤 인연으로 노이 16세와 나폴레옹이 운명 공동체로 엮이게 된 걸까요.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사건

프랑스는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대혼돈을 겪게 되는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주변 군주국이 공격하게 되면서 대내외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변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 바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입니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는 시골뜨기라고 놀림을 받았고 장교가 되어서도 군인으로서 어떤 활약도 보이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국민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걸까요. 
전투 경험도 많지 않았던 그가 연이은 출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정치권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2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1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을 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프랑스 대혁명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은 나폴레옹의 비결 지금 바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시기 왕정 폐지론자 중에서 부각되는 지도자가 광토 마라 로베스피에르입니다. 
당시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파는 자코뱅당과 지롱드 당이라는 두 세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당통은 활발한 선동가였고 굉장히 사교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었어요.

타협도 잘하고 계략도 잘 꾸미고 그리고 이분은 또 특기가 연애 보통 스무 살 어린 여자랑 나중에 결혼하고 막 그러는데 흔히들 표현하면 삶의 밝은 곳을 사랑했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람도 처음에는 과교파였어요. 
그 다음에 이제 이 당통의 반대가 로베스피에르인데 로베스피에르는 좋게 말하면은 과학의 진지한 심하게 말하면 음울한 신념이었다고 하죠. 
로베스페르의 특징은 청렴결백했다는 겁니다. 
나폴레옹도 너 로베스페르를 왜 존경하니 청렴결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이게 엄청나게 어필을 합니다. 지금까지도

대신에 로베스피에르는 청년 결백하긴 한데 자기 신념이 너무 강했어요. 
오직 자기 신념과 자기 가치관에 갇혀 사는 사람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합니다. 혁명 초기에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이런 상반된 개성이 서로를 보완하는 효과를 줍니다.

공화정이 성립하자 루이 16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팽팽하게 맞섭니다. 
로베스 피에르와 마라 생기스트는 국왕 처형을 주장합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죽어야 국론을 통일하고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고 왕은 무죄일지도 모르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한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궁전 금고에서 루이 16세가 반혁명 음모를 용인하는 문서 외국과 내통한 편지에요. 
이것이 발견이 됩니다. 결국 그는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서 국회 투표를 했더니 처형이 의결이 됩니다. 
무죄가 334표 유죄가 387표였습니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촬영됩니다. 
이때 루이 16세의 마지막 말이 짐은 죄 없이 죽는다 였습니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해 10월 16일에 단도대에 올라 처형됩니다.

그러면 노이 16세의 처형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이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과연 이건 무슨 뜻일까요. 
사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급속히 진행되는 동안 나폴레옹은 대부분 코르시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르시카의 의용대 부사령관이 되었고 프랑스의 상황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죠. 
이때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사면을 받아서 과거 혁명 영웅이었던 파울리가 귀국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그와 협력해서 프랑스가 혁명으로 어수선한 사이에 코르시카를 독립시키고 안정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파울리는 프랑스로 변절했던 나폴레옹 집안을 당연히 좋게 생각하지 않았죠.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이 점점 깊어졌는데 루이 16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파울리는 옛날 사람이었기 때문에 코르시카를 독립시켜도 왕당파였어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급진적인 자코뱅 성격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아직 독립도 안 했는데 독립한 후에 코르시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이 완전히 갈라지게 되죠. 
당시에 나폴레옹은 굉장히 급진적이어서 마라와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군대를 조직해서 파르데니아 원정을 시도하는데 파올리의 방해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뿐 아니라 정적으로 몰려가서 또 친 프랑스 파다 이렇게 돼서 파울리는 나폴레옹을 구금하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게 됩니다. 
여기서 죽을 뻔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코르시카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나폴레옹이 내내 가난하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 이 중간에 부유했던 집안 일족의 유산을 받아서 꽤 살만하게 변해버렸어요. 
사실은 그래서 코르시카로 돌아가서 이제 형은 의원이 되고 뭐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정점에 올라가야 될 때에 코르시카에서는 반역자가 되고 벌었던 재산은 다 몰수 당하고 그야말로 완전한 실패자로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포르시카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는 프랑스인으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폴레옹은 리스에 있는 정규군 부대로 다시 복귀하게 됩니다. 
혁명은 깊어져 가는데 이때 대외적인 공격이 시작됩니다. 
반 프랑스 연합군 반혁명 연합군이 결성되게 되죠.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주변의 모든 왕정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 주변의 군주국들 영국 오스트리아 에스파니아 등이 프랑스에 대항해 반 프랑스 동맹을 맺고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외국 군대의 침입으로 프랑스는 힘겹게 전투를 벌이게 되고 최대의 위기를 겪게 되죠. 
국내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이 벌어집니다. 
급진파 온건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왕당파도 부활하려고 하고 또 새로운 국가가 중앙집권적 국가가 돼야 되느냐 지역 지방자치를 인정해야 되느냐 이걸 가지고도 싸움이 납니다. 
이런 와중에서 방대 지방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죠.

그러자 이를 진압하려고 프랑스 공화국 군대가 파견되는데 반란군과 정부군 모두 합쳐서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 방대 반란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역사의 진짜 의역산데 혁명을 지지하는 시민 공화국이 가서 농민과 아이들까지 모조리 학살하고 반란을 일으킨 도시는 그냥 싹 밀어버려서 지워버리자 이런 정책이 시행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지금 외국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또 외국하고도 싸워야 됩니다. 
프랑스는 대규모 직립을 시작했는데 무려 75만 명을 징병합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아닌 왕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왕당파들이 툴롱이라는 도시를 장악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출렁이 대단히 중요한 도시입니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도시로 프랑스가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왕당파는 도시를 장악한 다음에 공화국 군대를 막기 위해서 왕정을 지지하는 영국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영국 함대가 스페인 이탈리아 군대를 이끌고 툴롱에 상륙하게 되어 그러자 프랑스 공화국 쪽에서는 당연히 출렁을 탈환해야겠죠. 
그래서 출렁 포이전이 벌어지는데 이때 바로 옆 도시인 마르세 위에 있던 나폴레옹이 이 작전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러면 나폴레옹은 어떻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을까요. 
이때 운도 좋았어요. 코르시카 출신의 국민공익 의원이 툴롱의 보병대리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다 나폴령을 밀어줍니다. 
나폴령은 이제 대위로 진급해서 툴롱 탈환 작전에 투입되게 되죠. 
이때 전쟁에서 이제 새로운 신무기가 대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공화국에는 포병 장교가 별로 없어가지고 처음에 출렁 시내를 대포를 설치해 놨는데 사거리를 계산을 못해서 저까지 닿지도 않는 거야 근데 다 대포를 떡 갖다 놓고 저기를 쏜다고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포병 지휘관이라서 가보니까 이게 뭐 혁명군의 전투력이나 상황이 엉망인 거예요. 
나폴레옹은 이때 자기가 활약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단 포가 너무 적다. 포를 모아라 그리고 포를 운영하려면 유능한 병사들을 찾아야 된다

이제 돌아다니면서 유능한 병사들을 찾아서 포병으로 충당하고 함께 먹고 자면서 정열적으로 대대를 이끕니다. 
그런데 툴롱이 완전히 요새화 된 군항이어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어요. 
여기서 나폴레옹이 적의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을 찾아냅니다. 
툴롱에 주둔하고 있는 지상군이 아니라 항구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함대를 격멸시켜야 한다

이런 판단 하에 툴롱 함대를 포격할 수 있는 에기에트라는 곳에 있는 요세를 차지해야 한다고 키 포인트를 집어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이곳을 탈환하러 오는 영국군을 격퇴하면서 툴롱 전투의 영웅이 되는데 툴렁에서 보여준 나폴레옹의 모습은 제가 볼 땐 직중이에요.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화려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포병대대장으로 내가 성공해야겠다.

제 생각에는 이때 인생의 비결을 찾은 것 같아요. 
저희가 나폴레옹이 집중 포격을 실시했다고 그러는데 그거 쉽지 않아 그런데 당시에 군 지휘 체제라든가 보급이라든가 이런 게 산지 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여기를 공격해야 하고 나폴리 키포인트를 찍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다 대포와 탄력과 보급과 병사를 모아야 합니다.

시장에게 지휘관에게 다른 데 연대장에게 설득하고 수송 병력을 빼줘라 이것을 하기 위해서 날밤을 새면서 집중을 해서 하나의 포대를 만든 출렁에서 굉장히 작은 규모의 부대를 운영하지만 그 후에 나폴레옹이 보여준 군사작전에서의 총괄적인 능력을 이미 여기서 실행하게 이렇게 돼서 나폴레옹은 툴롱에서 여운이 됩니다.

로베스 피에르에게도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포병대위에서 준장으로 단박에 승진하게 됩니다. 
이동안에 국민공예는 본격적으로 공포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로베스피에르가 있었죠. 로맨스 피에로는 변호사 출신답게 사무적으로 굉장히 정확하고 조직력 행정력 통솔력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무상 의무 교육을 도입하고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생필품하고 임금에 대해서 최고 가격제라는 걸 도입을 해서 정부가 시장 가격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효과를 나서 엄청나게 물가를 폭등시켜서 자기를 지지하는 기본 세력인 불만을 사게 돼요.

로베스 피에르는 신념이 너무 탁월해서 악과 타협해서 선을 이룰 수 없다. 
악을 제거해야 선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법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반혁명 인사들하고 혁명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집단 처형을 시행합니다. 
심지어 2천여 명이 한꺼번에 루아르 강에 수장되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는 반혁명 협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빈민들에게 나눠준다는 내용의 법령도 공포합니다. 
처음에는 환영했죠. 그런데 물가가 오르고 빵값이 오르고 이게 얻는 것보다 내는 게 더 많아지는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민중들도 등을 돌리게 되는데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불만이 올라오게 되자 자기의 방법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하게 됩니다. 
1792년 7월에 프레리앙 22일법이라는 것을 통과시키는데 혐의만 있어도 반혁명 분자들을 채용할 수 있게 합니다.

혁명에 반대하지 않아도 혁명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애는 증거가 없어도 죽이자 이렇게 된 거죠. 
이때부터 혁명 재판소가 그냥 사형 집행소가 되는데 50일도 되지 않아서 1300명 이상에게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리고 1년 동안에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로베스 피에르의 독재가 극에 달하자 당통은 사람에게 신물이 난다. 
라면서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은퇴를 하고 비판을 하니까 로베스피에르의 눈 밖에 나서 단두대로 가게 되죠. 
그가 단두대로 가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사무실 밑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이런 말을 하죠. 
혁명재판소를 설립한 것을 후회한다 로베스 피에르어 다음 차례는 너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반감이 생기는 것 자체가 반혁명적 사고라고 생각을 해버렸다. 
그리고 의회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숙청을 주도하던 다시 말하면 자기의 최고 심복이던 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도 숙청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립니다. 
그러자 의원들이 집단 반발해요. 그리고 현장에서 헌병을 동원해서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해서 채용하기로 합니다.

공포 정치로 국가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오히려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죄로 처형되게 됩니다. 
로베스 피에르가 실각하자 나폴레옹도 체포됩니다. 
나폴레옹이 성공하는 데는 로베스피에르의 도움이 컸어요.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프랑스 군은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거의 반반 어떻게 보면 부루주아들이 상당히 하급 장교 실무장교진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로베스 페르가 공포 정치를 하면서 혁명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애들도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보니 군대에 있는 부르조아 장교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거기다가 로베스피에르의 적은 왕당파가 아니라 이제 부르조아라든가 부르조아랑 친한 일반 민중까지도 가 있는데 이 부르조아 장교들을 어떻게 신용합니까

이때 나폴레옹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동생하고 친하게 되고 자코뱅이라고 그러고 자긴 말하라는 를 존경한다고 그러고 로베스피에르가 보니까 얘 프랑스에도 아니고 코르시카이고 과거 전력을 보니 뭐 한 것도 없고 너무 마음에 들잖아요. 
드디어 나타난 거죠. 그러니까 단숨에 준장으로 진급하게 됐던 겁니다.

이래서 잘 나가서 나폴레옹은 신나게 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베스 페르가 몰락해버린 이제 나폴레옹의 위기가 닥쳐요 그런데 진짜 머리 좋아요.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기에 이런 글을 적습니다. 
나는 그가 청렴하다는 말을 듣고 경여했다. 
하지만 이렇게 독재를 할 줄은 몰랐다. 
내 형제라도 독재를 도모했으면 처단했을 것이다. 
귀신같이 이런 말을 써놓고 체포가 됩니다. 
그리고 너 로베스 피에르 하지 난 아니라고

그래서 모든 문서를 샅샅이 뒤지고 일기를 검사했는데 이 말이 결정적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문장도 개들이 봤겠죠. 
그리고 당시 국민 공예는 가능하면 로베스 피해로 이제 반대가 돼갖고 안 죽이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폴령이 석방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저는 못 믿겠다고 그래서 보직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돼서 나폴레옹이 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약간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자 그러면 로베스 피에르는 왜 이렇게 쉽게 몰락했느냐 정치사를 보면 로베스 피에르의 체포와 몰락만큼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없어요. 
왜냐하면 갑작스럽게 공화정이 생겼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는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얼마나 단순하고 편견과 욕망에 좌우되며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베스 피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데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든 비난하는 사람이든 이 평가가 제일 정확한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이 정의롭고 청렴결백하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릴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란 하나 삶을 줄 모르면서 세상 모든 문제를 정화하는 확실한 방법을 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생각에 조그만 회의도 없었다. 
제가 솔직히 말하면 로베스피에르가 너무 극단적으로 가긴 갔어요. 
무상 교육을 한다고 그랬지

사실 그게 민중을 올바른 교육을 기회를 제공하려고 그걸 만든 게 아니고 자기가 보니까 반대하는 애들이 많아진다는 거죠. 
그래서 학생을 부모하고 격리시키려고 합니다. 
이미 부모들은 오염된 세상에 살아서 오염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국가기관을 만들어서 애들을 수용해서 집단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얘기를 해요. 
이런 생각은 인류 역사가 생겨서부터 지금까지도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꼭 잘못됐다 없어져야 된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데 이런 생각들이 다수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포 정치를 겪으면서 로베스 피에르를 지지했던 파리의 시민들도 공포정치의 극렬한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이 로베스피에르 이후에 선거를 해봤더니 왕당파가 대규모 집권할 정도로 실제로 민심 이반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자 이렇게 해서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 주도권이 부르조아 계층 지롱드 당의 온건파들에게 가게 됩니다.

그리고 총재 정부가 등장하게 되죠. 총재 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프랑스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라고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그러니까 농민들은 무조건 곡물값 올려라 도시 노동자들은 공모가를 내려라 이런 것들이 그냥 원색적으로 충돌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정책을 내도 공격을 받고 물가는 급격하게 치솟으면서 혁명정부가 만들었던 화폐 가치는 제로로까지 떨어진다.

이렇게 경제 사악이 최악으로 향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도 당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영할 줄 몰랐다는 거죠. 
결국 사람들이 느끼는 건 혁명은 혼란과 폭력을 가져오더라라는 것만 느끼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아요. 
새 체제가 필요하다

이제 국민들은 자기 이해관계가 100%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단 사회가 안정되는 것을 원할 것이다. 
두 번째 지금 대회의 전쟁이 시작되고 대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경제적인 이득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달성하는 사람은 나라의 영웅이 될 것이고 새로운 체제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를 정복하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금덩이와 예술품이 가득 찬 나라를 털어 올 수 있다. 
동시에 이탈리아 스위스 통로를 막음으로 해서 오스트리아가 남부로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급소를 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로베스피에르파로 찍혔기 때문에 총재 정부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서 총재 정부의 신임을 얻고 자기가 꿈꾸던 대외 원정을 시작함으로써 프랑스의 국내적 위기와 국외적 위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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