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로 역사는 바뀌지 않아요. 경우의 수를 뛰어넘는 열망을 갖고 있어야죠.
우리가 모든 국민들이 그냥 앉아가지고 우리는 안 돼.
지금 갈등의 시기야. 둘 중에 어느 편에 붙어 이 얘기만 하고 있으면 그냥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근데 지금 우리나라의 구조가 어때요? 어느 편으로 붙어서 끝날 수 없는 나라잖아.
지금 반도 국가의 숙명이잖아요.
손자 병법을 보면 싸워서 이기는 거는 하책이라는 말이 나와요.
싸워서 이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외교라는 거예요.
외교라는 것은 무형의 싸움이거든요. 여러 사태를 관망하고 자원을 검토하고 그 모든 현상들이 나와 우리 공동체에 득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가는 종합 예술의 극치라는 거죠.
그러면 외교 우리나라의 외교는 어땠을까? 우리나라는 태생적으로 일방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나라예요.
왜냐 애초에 분단국가로 시작을 했고 그다음에 전쟁을 벌였고 우리 안의 내전의 상처가 너무 크잖아요.
근데 흥미로운 게 뭐냐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은 동맹국과 친하게 지내되 동맹국의 뜻대로 안 따라갔다는 거예요.
가장 눈에 띄는 사건으로서 박정희 정권기 때의 균형 외교와 김대중 정권기 때의 균형 외교를 이야기해보면 또 다시 지금 격동하고 있잖아요.
세계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귀한 화두를 얻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좀 해보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기의 가장 큰 변화는 뭐냐 북진 통일론에서 승공통일론으로의 변화입니다.
즉 이승만 정권기 때의 외교적 패착을 극복하는 게 박정희 정권의 시작인 거예요.
그전까지 이승만 정권은 북진을 밀고 올라가서 통일하겠다 이거에 굉장히 경도가 돼 있었단 말이에요.
그 결과가 뭐예요? 파국적인 내전으로 귀결이 됐잖아요.
군부 정권이었던 박정희 정권은 누구보다도 전쟁에 대해서 잘 아는 집단이에요.
그래서 그걸 악용할 수도 있어요. 더더더 호전적인 방법을 쓰면서 살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하죠.
권력을 잡고 승공통일론 이제는 체제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더 잘 먹고 잘 사는가를 통해서 국력을 키워서 장기적 전망 속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겠다라는 걸로 외교의 방식을 확 바꿔요.
국경 국력 자체를 기르는 체제 경쟁의 시대로 전환한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북한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 돼요.
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경제개발 뭐 몇 개년 계획 뭐 미국으로의 수출 얼마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 경제 경제 수출 자동차 아니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 전까지 군사 지도자였었고 오일 6 군사 끝에다라는 것 자체도 사 19 혁명의 영향이 크거든요.
혁명적 분위기가 굉장히 강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초기에는 이 박정희 정권이 했던 것 중에 핵심이 뭐냐면 부정부패 공무원도 척결해 버린다는 농어촌 부채를 급진적으로 탕감해 준다라든지 가장 유명한 게 화폐 기업이죠.
지금이야 다 모든 게 금융으로 전자 디지털로 이루어지지만 이때는 다 현금이잖아요.
집 안에 있는 모든 자금 금고에 갇혀 있는 자금이 화폐에 가가 가면 돈을 바꿔야 되잖아요.
안 바꾸면 휴지하게 되니까 그때 이걸 다 파악을 해서 우리나라의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을 대거 환수해서 국가 경제 바르게 세우겠다는 전략이었었어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초기에 군정 단계 때의 과정들을 보게 되면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고 체제 개혁적인 성격들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강해요.
근데 문제는 뭐냐
화폐 그랬더니 나오는 게 없어. 뭐가 좀 많이 있어야지 끄집어 나오면 좀 분배도 하고 하는 건데 일단 나와봤자 얼마 안 돼요.
그걸로 나라를 살릴 수가 없어요. 두 번째 문제 뭐냐 이런 식의 민족주의적인 태도 자체에 대해서 미국이 굉장히 싫어해요.
그래서 미국에서 가이드라인을 주죠. 그 가이드라인이 두 가지예요.
하나가 뭐냐 한미일 3각 안보 체제에 들어와라.
우리가 이제 원조가 아니라 차관 경제로 들어갈 테니까 자본으로의 미국 기술로의 일본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로 경공업이나 아니면 소비재 공업을 니네가 담당해라.
미국과 일본과 대한민국의 위계적인 구조를 만든다라는 것이 미국의 플랜이에요.
이걸 받아들이지 않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 불가능한 얘기죠.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는 이걸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을 해요.
한일 협정도 맺게 되고 일본과 동맹도 하게 되고 그리고 그 위기의 그룹 안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우리가 경부고속도로도 뚫고 일본과 미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물건을 팔기 시작을 했잖아요.
그 틀을 따르게 되니까 오늘 이득이 있어요.
그런데 그 틀만 계속 따르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요 날 경공업 국가 소비자 국가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 멈추는 게 아닌 거죠. 이걸 받아들인다면 푸는 방식에서 박정희 정권이 미국이 원하는 그림들을 안 갔다는 거죠.
그래서 이 당시에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에요.
이승만 조건 같은 경우는 거절했었던 정책이에요.
왜냐하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최초로 한 나라가 어디예요? 소련 스타일링이에요.
소련 스타일리 경제를 개발 계획을 하는 건 이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거예요.
근데 지금 이 군사 정권과 반공 정권이 사실은 그걸 받아들인 거거든요.
왜냐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봐도 미국식의 어떤 자유시장 유지로 안 되거든요.
경공업과 소비재 공업으로 시작을 하지만 이미 60년대 중반이 되게 되면 소위 말하는 개발 전략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중화공업으로의 이행 전략으로 들어가 버리잖아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구조를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구조 안에서 3위에 머무르지 않겠다라는 거죠.
치고 올라가겠다는 거죠. 이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이 보여줬던 특유의 어떤 균형 외교적인 도전 정신도 있겠고 반대편에선 그만큼 1960년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거예요.
지금 형평과 처지상 미국의 도움 받을 수밖에 없고 일본 따라 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먹을 수는 없다.
우리 안에 드글드글 끓고 있는 에너지가 뭐냐 이것도 우리가 좀 주목해서 볼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들글들글 끓고 있는 국민들만 바라보면서 만용을 저지르는 것도 잘못된 외교지만 활용하지 못하는 외교도 그건 제대로 대된 외교 아니요 방향을 잘 봤죠 그리고 이제 좀 더 논쟁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이 베트남 파병 당시대의 과정을 보더라도 일본군은 이제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군대이기 때문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던 상황이죠.
거기에 이제 들어가서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박정희 정권은 군사동맹을 통해서 미일 경제동맹에 대한 도전을 시도했었다.
뜻대로 되진 않았죠. 실패했죠. 근데 어찌 됐건 중요한 사실 이제 그런 시도를 했다라는 것 자체도 우리가 좀 의미 있게 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를 이제 우리가 가장 대조해서 볼 수 있는 게 뭐냐면 고종의 일방주의 외교와 완전히 달랐다는 거예요.
고종 흥선대원 같은 사람들이 했던 외교가 뭐예요? 무조건 청나라 따르는 거 아니에요 지금 당장 일본이 위협이 되니까 무조건 러시아 따르는 거예요.
한 편에 무조건 붙어서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해줄 것 같다라는 어떤 그런 답 없는 외교.
근데 이제 박정희 시대 때 외교를 보게 되면 그 시대의 구조에 수능을 하되 우리보다 상위 계급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대상을 어떻게 하면 이용하지만 비틀어서 내 걸로 만들고 내가 그 계단을 올라갈 것인가에 대한 설계를 했다라는 거죠.
그리고 그게 정권의 지도자들만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국민들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거죠.
그게 결부가 되면서
특유의 계단 오르기 식 경제 성장에 성공을 하게 되는 이런 부분은 우리가 조금 더 아직 연구가 많이 된 부분이 아니어서 저도 이 정도밖에 얘기를 못하겠지만 조금 더 과감하고 진중한 연구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햇볕정책의 창시장은 노 1989년에 냉전이 붕괴가 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면서 급격하게 세상이 변하고 있고 공산권이 무너지고 있고 그걸 거꾸로 뒤집어서 얘기하면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데 이게 다 돈이야 가서 장사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물건을 팔아야 될 거 아니에요 러시아에 조코파이 팔고 헝가리 자동차 팔고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레토릭을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냐 북방외교 그리고
경제 영토 학자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멸공 빨갱이 이랬는데 이제부터 공상권과 친하게 지내겠다 이러면 이게 말이 이상하잖아 그러니까 톤 다운을 하는 거죠.
같은 행동이지만 말을 바꾸는 거예요.
대북 혹은 공산권에 대한 화해와 타협의 정책을 먼저 열었던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고 한국의 보수 세력이었어요.
근데 그거를 누가 받았냐 같은 당의 후임인 김영삼 대통령이 받은 게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거죠.
그냥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만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 노태우 정권에서 굉장히 중요한 활약을 했었던 국정원과 군부 출신의 임동원이라는 사람을 끄집어내와서 햇볕 정책의 수장으로 데리고 와서 이 정책을 추진했거든요.
여기서도 하나의 굉장히 어떤 한국의 독특한 균형 외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 어느 정당을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을 살펴보게 되는 거죠.
과거 박정희 정권 시대의 패러다임이라는 건 대결의 패러다임이거든요.
그건 깰 수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체제 대결의 힘이에요.
근데 90년에 89년 90년에 냉전의 구조가 붕괴가 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먼저 막 나와서
수교 맵고 막 장사하고 맥도날드 막 실어나르고 이런 상황이 되니까 우리도 뭔가를 해야 되잖아요.
중국과 잘 지내야 되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된다.
이 타이밍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사실 나왔던 게 이제 햇볕 정책이라는 거죠.
막 정보를 갖고 오거든. 정보를 갖고 오면 야 너희들이 갖고 온 정보를 보면 김정일은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국가를 운영하는데 이렇게 운영하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사실은 정부부터 새롭게 다 다 업데이트하는 작업으로 시작을 했고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데 네 번 정도 나는 도저히 더 이상 대화를 못 하겠다.
나만의 어떤 그 정당 정치를 당정으로 보는 거예요.
노소 분단과 뭐가 다르냐 조선이 당신으로 망했는데 너희들 똑같은 거 아니냐 무슨 대화를 이거를 이런 걸 이제 뚫고 나갔다라는 건데 여튼 간에 이제 중요한 사실은 이 노태우 정권기 즉 보수 정권에서 보여줬었던 북방 정책의 전례 그리고 남북 기본합의서라고 하는 문서적인 구체적인 남북 간의 고위급 회담의 합의를 98년이라는 또 다른 밀레니엄 시대의 김대중 정권의 입장에서 재해석을 한 거죠.
이 개성공단, 금강산 육로 관광
그리고 경의선 복구 같은 구체성으로 승화를 시키면서 사실상 이 보수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또 끌어내는 근데 여긴 또 또 여기에 근저가 또 뭐가 있냐면 언제나 중요한 건 국민 정서인데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반공 의식을 갖고 북한의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 평화라는 대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은 굉장히 존중한단 말이에요.
보수든 진보든을 떠나서 한국인들이 본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민족의 평화와 번영이고 이 평화와 번영 앞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북한 문제구나
이걸 읽어낸 거죠. 그래서 그게 같이 가니까 이 힘이 이제 가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제 또 하나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면 약자의 논리거든요.
강자들은 자기의 힘의 원리를 관철시킬 때 명분을 필요로 해요.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저도 이제 군대 갔었을 때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면서도 내가 왜 괴롭히는 줄 알아? 첫째 우리 선임병이 날 괴롭혀서 내가 이상해졌다.
도덕적 명분은 합리화를 찾죠. 두 번째 니들이 열심히 안 해서 그렇다 하면서 괴롭힌다는 거예요.
그 말도 안 되는 괴롭힘의 현장에서도 인간은 명분과 윤리를 찾아요.
국제 외교도 똑같아요. 강자는 강제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고 할 때 명분을 찾아요.
근데 그게 약자한테 아주 좋아요. 왜? 평화 인류의 화목 협동 이 이야기할 때 약자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거 노태우 김대균 때 보여줬던 어떤 이런 남북 화해 협력 정책 같은 게 냉전을 완화시키고 동북아의 긴장 관계를 다운시키면서 세계의 번영을 이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되게 많이 놓치는 게 뭐가 있냐면 거의 다 이제 데 아세안 플러스3라는 게 나와요.
한중일이 1990년대 말 2천년대 초반으로 보게 되면 제대로 된 협의체가 없는 거예요.
좀 객관적으로 얘기해서 우리보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아세한테 저렇게 연대를 잘하고 있는데 한중일이 뭐 하는 거냐 니들 셋이 합치면 eu를 뛰어넘는다.
니들 셋이 합치면 미국 이유 합친 것보다 세다 이런 얘기 많이 했었거든요.
아세안이 해마다 정기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때 같이 만납시다 밥 먹읍시다
해서 김대중 정권의 제안으로 이 당시 중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지도자들이 같이 와요.
아세안 회의가 열릴 때마다 한중일 정상회담이 계속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걸 갖다 우리가 아세안 플러스3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아세안 플러스 3가 만들어지고 나니까 여기서 그럼 우리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갈까에 대해서 동아아시아 포로문도 만들어보자.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장차관급의 핵심적인 국가 운영 리더들이 모여서
3국의 연대 발전 방안을 플랜을 모색해보자라는 각종 협의체가 발전이 되게 되면서 지금은 그냥 거의 매해 정례적으로 만나죠.
이게 먹히는 게 뭐냐면 지금과 같이 미중 대립이 심하지 않을 때였어요.
그 당시에. 그래서 일단은 미국도 중국에 대해서 호감이 있었고 반대편으로 일본 내 보수 자민당 내에서 완전히 세계관은 우리가 되게 싫어하는 걸로 뭉쳐져 있지만 아시아인들이 좀 잘 돼야 된다
한중이 연대해야 된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좀 백인들 앞에서 이렇게 불어야 돼 이런 정신이 또 잡민당 내에 고고한 흐름이 하나 있어요.
그것도 이용해 먹은 거예요.
그러면서 사실은 이 아세안 플러스3를 지금 많이 읽고 있지만 아세안 플러스 3가 한국이 처음으로 일어서서 미국과의 협력적 파트너십을 그대로 유지하되 우리보다 약한 나라와의 연대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나라 혹은 새롭게 떠오르는 나라와의 협의체를 구성하면서 우리의 존재감을 불렸었던 되게 중요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수많은 외교학자들이 강조하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이렇게 얘기하죠.
근데 왜 두 명을 묶었어요 이어지잖아요.
보세요. 가난했고 힘이 없고 미국 일본 말고는 방법이 없을 때 체제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경제 성장을 하되 따라잡기를 선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 관계의 균열이 날 적에 과감한 선택을 해서 반공주의자지만 공산권과의 연대를 만들어버리고
그리고 이젠 우리가 경제적인 여력과 힘이 있으니까 또 다른 친구들이 만들어서 친구가 많아지면 좋잖아요.
그러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을 계속 올라온 가정 이게 되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균형 외교사라는 주민도 마찬가지예요.
경우의 수로 역사는 바뀌지 않아요. 경우의 수를 뛰어넘는 열망을 갖고 있어야죠.
그게 외교로 드러나는 우리가 모든 국민들이 그냥 앉아서 우리는 안 돼.
지금 갈등의 시기야. 둘 중에 어느 편에 붙어
이 얘기만 하고 있으면 그냥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근데 지금 우리나라의 구조가 어때요? 어느 편으로 붙어서 끝날 수 없는 나라잖아.
지금 반도 국가의 숙명이잖아요. 여러 외교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다중 동맹론이라든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넘어서는 또 과거의 어떤 북방 정책이나 햇볕 정책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어떤 그런 남북 화해 협력이라든지 혹은 일본 문제나 중국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형태의 해법을 모색한다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길의 도전과 노력이 있었을 때 역사는 열리는 거죠.
그런 힘을 좀 우리가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