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끝은 조금 특수했습니다. 백제의 경우 백제 멸망 후 옛 백제 땅이 전부가 신라로 넘어가면서 백제인들도 전부 신라로 흡수되었습니다.
신라 역시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했을 때 신라 땅 전부 고려의 땅이 되면서 신라인들도 고려로 자동적으로 흡수되었고요 그런데 고구려는 달랐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전부 지금의 한국인이 되었지만 고구려 후예들은 꼭 한국인만 된 건 아니거든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할 때 백제의 땅은 모두 통합했을지언정 고구려의 영토는 고구려의 남부 지방만 대동강 이남으로만 가져갔기 때문에 고구려 영토 전체를 신라가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가 얻지 못한 대동강 이북에 대동강 이북부터가 어떻게 보면 고구려의 핵심지였는데 이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들은
신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붕 떠버린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넘어갔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중국 당나라가 옛 고구려 영토 전부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나당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주의 각종 이민족들의 반란 그리고 당나라 행정력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하며 당나라도 옛 고구려 영토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물론 발레가 이 지역을 차지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부터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까지 그 공백의 기간 고구려 유민들은 모두 어떻게 됐을까요.
우선 신라로 편입된 고구려인들이 있었습니다.
대동강 이남으로는 신라 땅이 되었기에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은 모두 신라로 편입되었죠.
굳이 대동강 이남의 주민들이 아니더라도 고구려 멸망 직전 연개소문의 동생 연종토가 신라 김유신에게 항복합니다.
당시 고구려에서 가장 권력이 막강했던 대막리지 연계의 소문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항복할 때 어디 혼자서만 했겠습니까 연정토는 성읍 12개와 자신의 직칼물리 4천여 명을 데리고 항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부흥 운동의 실패로 끝나자 신라 정부에 의해 보호를 받았던 고구려 방계 왕족 안승 또한 신라 사회로 편입이 되는데 안승 역시 혼자만 온 게 아니라 안승을 따르던 고구려 무리 4천 가구가 신라로 들어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 또한 고구려 멸망전에 참가하면서 데리고 온 고구려 전쟁 포로들 또한 향후 신라 내부에서 터전을 잡아 살아갈 수밖에 없었죠.
따라서 신라가 설령 고구려 영토 일부만 가져왔더라도 결코 적지 않은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의 중앙군이었던 구서당 부대 중 황금서당은 고구려 출신 병사들로만 구성된 부대였죠.
고구려 유민들 중 많은 비율은 아니지만 일부는 일본어로 자발적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미 고구려는 후반기부터 여러 문물들을 일본으로 전해주며 백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일본과 꽤 좋은 외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신빙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일본 서기에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일본이 고구려와 교류했다는 기록이 15차례 정도 나옵니다.
이는 고구려의 일부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오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고 볼 수 있죠
일본 어느 한 군데 정해지지 않고 여러 곳에 정착했는데 이 중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정왕의 아들 고약광도 있었고 일본 정부는 고약광에게 고구려 왕족이라며 고려를 이러 식으로 발음한 고마 씨 성을 하사합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리 동맹국이었다고 할지라도 대규모 난민들이 자국으로 들어오면 부담스러운 법입니다.
일본 정부 측은 고구려 난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마 시성을 받은 고약광 포함. 고구려 유민 1799명을 도쿄 인근의 작은 마을에 집단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일본 측 사서에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 이름을 고약광의 성씨마씨를 따와 고마군이라고 불렀죠 이 고마군은 천 년 넘게 지속되다가 사이타마 현에 흡수되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이 고마군 지역의 신사에서는 고약광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다카마스 고분이라고 있는데 이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매우 흡사합니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일본의 다카마스 고분 축조 시기가 고구려 멸망 후라는 거죠.
즉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 고분 벽화 문화에 지역적으로나마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많이 고구려인들이 넘어가게 된 곳은 중국이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가 고구려 백성들을 가만 놔둘리 만무했죠.
그대로 두면 계속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할 텐데 고구려인들을 뿔뿔이 찢어놓아서 민족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죠.
기록에는 당나라 정부가 고구려 유민 2만 8천 가구 약 20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다고 나옵니다.
중국 땅더리가 워낙 넓다 보니 중국 본토 내부에서도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 이주된 곳들이 갈립니다.
먼저 중국 서쪽
고비 사막 서쪽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감숙성 섬서성 일대입니다.
이 지역은 당나라 입장에서도 중앙아시아 민족들과 계속 싸우는 군사 지역입니다.
이곳으로 고구려 이민들을 보냈다는 건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고 실제 이 지역 고구려의 유민들로 구성된 부대를 고려병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출세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가 바로 고선지 장군이죠.
고선지 장군은 추후 당나라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의 대전투였던 탈라스 전투에도 참전합니다.
중국 서쪽뿐 아니라 오늘날의 하남성에 해당하는 중국 내륙 지방으로도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 지역 고구려 이민들에 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일부는 양쯔강 이남민 중국 최남단 지역으로도 이주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남쪽 소수민족 중 묘족이 고구려의 후예들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묘족의 바지 문화가 고구려의 의복 바지와 매우 흡사하고
묘족에게도 다른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난생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묘족에게도 고구려처럼 형사 취수제 문화가 있다죠 물론 어디까지나 설입니다.
당나라 내부 중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이주된 이들도 있었는데 당나라의 수도에 이주됐다는 건 고구려 왕족 및 지배층들이었다는 뜻이었겠죠.
중국 본토 어디든 강제 이주되기 전에 고구려 영토에서 중국 내부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해당하는 영주라는 곳입니다.
고구려 유민들뿐 아니라 다른 만주 지역과 요화 지역 이민족들이 중국 들어올 때는 이 영주를 반드시 지나쳐야 하죠.
그래서 이 영주에는 민족 구성이 굉장히 다양했습니다 고구려 유민들도 상당수였고요 이 영주라는 곳에는 당나라 관리의 차별적인 탄압 정책으로 불만을 품은 거란족이
당나라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혼란을 틈 타 영주에서 고구려 유민 세력들과 말갈족을 지휘하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탈출해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당나라는 영주에서 탈출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세력을 토벌하는 군대를 보내고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죽지만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데리고 계속 도망치다가 세운 국가가 발레입니다.
걸걸중상과 대조용 부자는 고구려 출신이라고 하며 대조형뿐 아니라 후대의 발의 국왕들도 고구려 왕을 자처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백히 합니다.
발레가 점점 성장해 이 고구려 영토 전체를 다 차지하기도 하고요 요동 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들도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시킬 때 당나라로 데려오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당나라가 한반도 내부 깊숙이 들어가기 힘든 실정이었고 욕심 내면 한 요동까지는 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요동은 몇백 년간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에 한때 적국인 당나라가 관리하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옛 고구려 영토 곳곳에 고구려인들을 요동 지역으로 몰고 이곳에 안동도호부가 있었으니 안동도호부의 당나라 관리가 아닌 당나라에게 항복한 고구려 지배층들을 임명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는 쪽을 선택 일종의 간접 지배 형태였던 건데 안동도호부를 고구려 지배층들이 관리한다고 한들 이미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에서 고구려 지배층들이 당나라 관직을 받았기 때문에 당나라는 본인들 영토라고 생각했죠.
초반엔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좌왕을 안동도호부 책임자로 명하는데 오히려 보좌왕이 유민들을 규합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꾀하자 발각되어 쫓겨나고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을 안동도호부 책임자로 임명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렸듯 당나라는 요동 요서 지역 전체를 관리할 힘이 부재했습니다.
영주 지역에서 거란족 반란이 일어나고 그 틈을 타 고구려 인민들이 더 동쪽에서 발해를 건국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안동도호부는 딱히 일을 잘 못했고 발해가 건국되면서
점차 만주와 요동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다가 요동 지역 유민들은 자연스럽게 영토를 넓혀가던 발해에 흡수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이 동네 고구려 유민들이 소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말도 있는데 이 실체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돌궐족이 있던 몽골 초원지대로 넘어간 고구려 유민들도 비율이 상당하답니다.
고구려 멸망 시점에서 몽골 초원을 주름 잡고 있던 유목민족은 돌궐족으로
당나라조차도 이 돌궐족을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돌골족이 당나라에 신경을 써준 사이에 이 대조영의 발레 건국의 시간을 벌 수도 있었고요 고구려는 국가 정체성 자체가 유목민족 습성이 다분했기 때문에 돌골족의 풍속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돌골족으로 넘어간 고구려 유민들을 통솔하던 사람은 고구려 귀족 출신이었던 고문관으로 이 고문관은 돌골 조이의 묵철 가의 사위가 되기도 하며 돌골 내부에서는 고문관을 고려 막리지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골족이 당나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이 시점이었던 715년 돌골족에 있던 고구려 유민 일부가 당나라에게 투항하죠.
물론 몽골 초원에 그대로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들 또한 있었으며 이들은 계속 유목 생활을 하며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 사회에 동화되어 갑니다.
즉 몽골 초원 민족들 중 일부는 고구려 후예들이란 말이죠.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솔론 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이 솔론족이 유목민족화된 고구려의 후회들이 아니냐는 설이 있습니다.
지금 몽골도 한국을 부를 때나 원나라 간섭기 때 원나라가 고려를 부르던 명칭이 솔롱고이거든요.
이곳저곳 디아스포라로 흩어졌던 고구려 유민들도 상당히 많았고 또 그대로 옛 고구려 영토에 있다가 바래로 흡수되기도 했습니다.
발해 멸망 후에도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은 한반도 북부에서 터전을 일구며 어떤 민족이라고 딱 규정짓기 어려운 소수민족들로 되었죠.
고구려와 발해가 저 먼 옛날의 고대 국가들이지만 그 흔적들을 아예 찾기 불가능한 건 아닌 만큼 이쪽 분야에 대한 연구도 더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