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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상가 묵자 묵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by 로이인랑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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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죽이면 죽을 죄가 하나 생기고 열 사람을 죽이면 죽을 죄가 10배가 되며 백사람을 죽이면 죽을 죄가 100배가 된다. 
군자들은 이를 불리라고 부르는데 나라를 공격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가 생기는 것을 어찌 의롭다 여기고 칭송하는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전국 당시 누군가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사람을 죽이 것은 마땅히 엄벌하면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는 왜 의로움이라는 감투를
씌우는 것일까 하고요 마침내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이익을 얻기 위함이고 이익을 얻을 수 없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요 전쟁을 일으킨 자에게 이 은커녕 쓴 패배를 보여주게 되면 다시는 누구도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침략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죠 그는 바로 묵자입니다. 
묵자는 생물 연대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흔한 고대 인물 특징이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로 정리했습니다.
묵자의 자는 존칭이며 본래 이름은 묵적입니다. 
왜 묵이란 성을 가졌을까요. 추정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묵은 검다라는 뜻이 있는데 그가 검은 피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보통 귀족이 아닌 노동자들이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피부가 짙었다. 
그래서 묵자가 노동자 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또는 묵형이란 형벌을 받은 죄인이라고도 하고 목수들이 쓰는 도구인 목주를 묵이라 하여 기술자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검은 옷 한 벌을 입고 다닌 사람이란 뜻
추정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묵자는 하층민이었다는 것이죠. 그는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 사람이며 대략 기원전 470 10년부터 391년까지 살았습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였죠. 
묵자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그리 사랑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족애보다 동료애를 중요시 했습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기계 다루는 일에 능숙했죠.
송나라에서 낮은 관직도 잠시 맡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유교를 배웠습니다. 제사 지내고 예를 갖추는 등 공자의 항문을 접했지만 묵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행사에 사용되는 옷가지나 음악 장례를 치르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죠. 
귀족들만 좋지 하층민들에겐 그저 사치와 낭비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유학을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공자는 이익을 탐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고 했지만 묵자는 이익
곧 의로운 길이라 했죠. 이익은 곧 백성들이 먹을 음식과 살 집 이불 옷이 되니까요. 
그래서 열심히 노동하고 아껴 쓰는 것이 몸에 배어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쉴 틈 없이 활동한 실천가였습니다. 
어느 날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목자는 특히 전쟁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죠.
전쟁 피해는 고스란히 하층민들 몫이었습니다. 
계급 구분 없이 모두가 평화롭기 바랐던 묵자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자 했습니다. 
묵자는 며칠을 쉬지 않고 초나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만나 전쟁을 멈춰달라 설득하죠. 
초나라 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안 되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공성 기술자인 공수반이 만들어 준 운제라는 공성 무기를 써봐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러자 묵자는 그 공성 모기는 소용이 없다면서 자기 허리띠를 불러 성벽을 만들고 모의 전투를 해볼 것을 제안했죠. 
같은 자리에 있던 공수만은
묵자와 모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홍수반은 나뭇가지로 운자를 표현해 성벽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수성술의 달인이었던 묵자는 막아냅니다. 
봉수반은 멈추지 않고 9번이나 더 공격했지만 묵자는 갖가지 방법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하죠. 
아직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많은 듯 여유로웠습니다. 
그러자 공수반이 말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 하나가 있으나 말하지 않겠습니다.
묵자는 이 말 뜻을 눈치채고 말했습니다. 
그 방법이란 저를 죽이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그것 또한 소용 없습니다. 송나라엔 내 제자들이 300명이나 있고 그들은 성을 막아낼 준비를 이미 다 으니까 공수반은 할 말을 이었습니다. 
이를 본 초나라 왕은 속나라 공격 계획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쟁을 막아낸 묵자는 돌아가다 속나라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도 오고 해서 속나라에 머물고자 했지만 경비병은 묵자를 들여보내주지 않았죠.
아마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묵자는 밤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수 밖에 없었죠. 
속나라를 구했지만 딱히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묵자입니다. 
이후로도 묵자는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으며 제 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도 막았습니다. 
막을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가 가진 다양한 장비로 성을 막아냅니다. 
때문에 묵자 집단은 전투에 뛰어난 군사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할 시 싸워야만 하니까요. 
군사집단은 규율이 엄격해야 통제가 됩니다. 
묵자 집단도 마찬가지죠
공자와 제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분위기였다면 묵자와 제자들은 명령에 죽고 사는 엄격한 관계였죠. 
특히 가족애를 넘어선 겸의 즉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사랑하고자 한 묵자 사상은 차별받고 있던 천민들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묵자 조직이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분명한 건 당시 전국 시대에는 군자 타령하는 육아보다 실용부터 전투까지 유용한 묵가사상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무가 아니면 도가인들 뿐이었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묵자는 묵과 학파라는 조직을 일으킨 후 쉴 새 없이 전쟁을 막으러 다녔습니다. 
게다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죠. 
이후 그에 대한 생의 마지막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중엔 제자들이 무가를 이어갔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가는 세 가지 학파로 갈라지게 됩니다. 
진나라 통일 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되죠.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산에 숨어 협객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고요 다음은 묵자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묵자라는 책은 묵자뿐만 아니라 후대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책입니다. 
총 71편이지만 53편만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겸애 귀신 실용 수성술 네 가지입니다. 
먼저 묵자 대표 사상인 겸애를 살펴 겸매는 평등사상입니다. 
존귀하거나 비천하고 친하고 먼 사이와 관계없이 모두가 똑같이 사랑받아야 한다는 뜻이
이는 가족애를 중요시한 공자와 대립합니다. 
공자는 차별적인 사랑인 별에 묵자는 평등한 사랑인 겸해를 주장했죠. 
근데 사람들은 겸애가 비현실적이라 비판합니다. 
어떻게 모두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묵자는 예를 하나 듭니다 만약 어린 자식을 두고 멀리 떠나야 한다고 봅시다 자식을 별에 하는 집에 맡길 것 아니면 겸애하는 집에 맡길 것입니까 다들 겸애하는 집을 원할 것이 분명한데 어찌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습니까
묵자에게 최고 이상향은 겸해인 것이죠. 
그래야 평화가 찾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생기는 이유도 겸해하지 않고 변해야 하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죠. 
자기 나라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겸애할 수 있다면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죠. 
이 사상은 기독교 교리와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성경 구절과 비슷하게 겸의 편에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묵자가 동양의 예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외친 사상가였으니까 박애주의자였던 묵자는 심지어 유일신을 믿기도 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귀신입니다. 묵자는 하늘이랑 신을 믿었습니다. 
육아에게 하늘은 1천 명을 내려주는 도덕적 상징이었다면 묵자에게 하늘은 인간들을 돌봐주는 격체 같은 존재였죠. 
동양에서는 흔히 볼 수 없거나 거의 유일합니다. 
천지 편에 그 내용이 써 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를 경우 하늘이 벌을 내려준다고 합니다. 
앞서 고대 왕조가 망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라고 하죠.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귀신들이 있는데
이 귀신들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상과 벌을 준다고 합니다. 
선조들이 옛날부터 제사를 지내온 이유라고 말합니다. 
이를 명기편에서 설명하죠. 즉 하늘 신은 나라를 크게 살펴보고 다며 귀신들은 하늘이 내려준 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상과 벌을 주는 존재들이죠. 
유학자들은 공자 말을 따라 귀신을 멀리하려고 했지만 묵자는 그럴 거면 제사는 왜 지내냐고 말합니다. 
손님도 없는데 상을 차릴 이유는 없다고 말이죠. 
그 밖에도 묵자는 여러 육아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특히 실용적이지 못한 거칠의 의식을 두고 말이죠. 
다음 키워드는 실용입니다.
묵자는 지독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낭비는 사채였죠. 
묵자가 가진 의의는 곧 이익이었습니다. 
이익에 반하는 사상과는 대립했습니다. 
특히 유가사상이죠. 공자는 어떻게든 3년상을 고집했습니다. 
묵자에게 이보다 심한 낭비는 없었습니다. 
귀족들이야 일 안 하고 상을 치어도 문제없지만 백성들은 한철 농사 짓지 않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3년상은 터무니 없으니 장례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죠. 
그 밖에도 비용을 절감시켜야 한다는
당시 호화롭게 꾸며진 음악을 반대하는 비약을 주장하며 육아를 다양하게 비판했습니다. 
묵자 일행은 대부분 민들이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의식주와 안전이었죠. 
전쟁으로서 안전하게 성을 방법 또한 묵자 책 마지막에 적혀 있습니다. 
마지막 키워드로 수성술입니다. 묵자 병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어 기술만큼은 손자병법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앞서 초나라 공수반이 준비한
운재는 성벽을 넘기 위한 긴 사다리입니다. 
현재 사다리차와 비슷한 형태죠 묵자는 운제가 무겁다는 약점을 이용해 물 웅덩이를 파두어 지체시킨 뒤 화살을 쏴아 망가뜨립니다. 
또한 적군이 성벽을 넘어오지 못하게 철심이 박힌 통나무를 성벽 밑으로 굴리기도 합니다. 
성벽 위에서도 따로 발코니 같은 이동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적들이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견제했습니다. 게다가 한 번에 60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도 만들었죠. 
마치 기관총처럼 말이죠. 때로는 적군이 성벽이 아닌 지하로 땅굴을 파고들면 이를 먼저 알아내고 대비하기 위한 법도 세웠습니다. 
먼저 구덩이를 파고 안에 큰 항아리를 넣습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고 구멍을 곰으로 감쌉니다. 
그러면 적군이 어느 방향에서 땅굴을 파는지 진동과 소리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죠. 
알아냈다면 적군이 판 땅굴에 연
적들을 모두 질식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최초의 화학전이라고도 합니다. 
묵자는 그야말로 방어술의 달인이었죠. 
반대로 공격을 위한 무기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방어를 위한 장비를 만들고 싸웠죠 그가 만든 수성 장비들은 실로 다양했고 국자 집단이 기술자였다는 사실이 면밀히 드러나죠 국가악판은 약 200년 동안 전국 시대를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진나라 통일 이후 2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분명 난세에 필요한 사상이었지만 통일 국가에서 평등 사상은 더 이상 불필요했죠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애야 한다는 학문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교가 주류 사상으로 들어선 이후로는 더욱이 그랬죠 오랜 시간이 지나 청나라 때 묵자가 재조명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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