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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안알려준 마지막 왕자와 공주의 기구한 삶

by 로이인랑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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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제일 처음에 제가 말씀드릴 건 고종의 가게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일단 고종은 부인이 총 13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군함 자녀 근데 거의 다 빨리 죽어요. 


장성에서 살아있는 아이들만 따지면 삼남 1녀입니다.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이렇게 4명이죠. 


근데 4명이 다 엄마가 다릅니다. 순종 이야기를 먼저 해드릴게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어요. 


근데 장성한 다음에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그게 뭐냐면 김홍륙 독차 사건이라고
이 김홍륙이 누구냐면 친러파에요. 고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었던 사람이거든요. 


근데 이제 이 사람이 이제 뒤에서 뭐 뒷돈도 받고 뭐도 하고 이러다가 쫓겨나요. 


그래서 거기에 앙심을 품고 고종이 주로 커피를 엄청 좋아했거든요. 


여기에다가 아편을 내가 타야겠다. 아편을 다량으로 넣으면 사람이 죽거든요. 


독이 됩니다. 아들이랑 같이 이제 먹는 먹고 있었던 거죠. 


고종은 워낙 미식가였대요 그래서 냄새를 맡고 어 이거 아니다. 


그래서 내려 놓은 거죠. 근데 이제 순종은 원샷을


아 진짜 꿀꺽꿀꺽 마신 거죠. 꿀꺽 다 먹어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진 거죠. 


그리고 몇날을 혈변을 보시고 이가 다 빠져 순종이 이 그게 다 틀리에요. 


그러면서 더 병약해질 수밖에 없어 지금도 순종의 사진을 보면 이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런 소문이 나요. 아 우리 황태자가 왕위를 이룰 수 없는 바보구나 사람들이 순종이 황제가 됐을 때 다 인정을 안 합니다. 


조금 가슴 아픈 일인 거죠. 그렇게 해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결국 살고


1907년에 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상 1907년도에 식민지였거든요. 
그러니까 식민지 시기에 왕이 됐었던 황제가 됐었던 비운의 황제가 되는 거죠. 


그리고 이런 얘기 하면 좀 그래 이게 뭐 뭐 기록이 남아 있는 거니까 창덕궁에 당구대에 갖다 놓고 당구를 그렇게 지었대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순종이 후사가 없어요. 그다음에 왕가를 잇는 사람이 영친왕이 되는 겁니다. 


조선 왕가를 잇는 공식적인 최후의 왕손이었다고 보시면 돼요 이 사람 나이로 따지면 원래 순종 다음에 의친왕 다음의 영친왕인데 의친왕이 왕이 되지 않았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당시 조선은 외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애가 엄마 쪽이 굉장히 중요한데 의친왕의 엄마 쪽이 좀 약해요. 
천민 출신이다. 보니까 힘이 없어요. 


그래서 의친왕이 아니라 영친왕은 황태자
이 사람은 순종이 황제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거의 반 쫓겨나다시피 가요 어떻게 보면 볼모로 잡힌 거죠. 


사실 거의 식민지였으니까 그래서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습니다. 
근데 이 고등교육이 뭐냐면 군에 입대 그냥 군대도 아니고요 사관학교에 있죠. 


원래 일본의 황실은
일본 황실의 자녀들을 사관학교에 보내가지고 장교로 생활을 하게 해요. 


근데 그거를 조선 황실에도 강요했었던 거죠. 
황실 사람이랑 결혼을 시키는데 그분 이름이 이방자 여사님 이분이랑 결혼을 하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시기에 중국에 가서 전쟁을 실제로 해요. 


이거는 개인사적 입장으로만 보면 일본으로 볼모로 끌려가가지고 군대 가가지고
이렇게 한 거지만 조선 전체의 입장에서 놓고 봤을 때는 그때 당시 조선 사람들이었다. 
어떨 것 같아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저렇게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아니 조선에 왕족이 저희 가가지고 그런 게 조금 쌓이다 보니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못 들어오다 일본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3년에 박정희 정권 때 공식적으로 한국에 들어와가지고 왔는데 말년까지 고생을 하다가 돌아가
조선의 마지막 황실 사람 중에 가장 특이한 사람을 이야기해봐라고 하면 위친왕 인데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머니 쪽 가게가 너무 좋지 않고 처음부터 약간 겉돌아요. 
그래서 굉장히 이른 시기에 일본도 한번 갔다. 


오고 유럽 순방도 갔다. 오고 이러면서 좀 밖으로 돕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대학 교육까지 받더라고 근데 미국 유학을 할 때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랑 연을 맺기 시작을 해요. 


그래서 나름대로 독립운동 근대화 플러스 민족주의 이런 거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었던 사람이죠. 
그 상황에서 1905년에 귀국을 합니다.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를 해요. 거기에서 2년 정도를 군대 장교 생활을 하는 거죠. 
유일합니다. 영장은 일본 가서 장교 생활을 했잖아요. 


대한제국에서 장교 생활을 했었던 유일한 왕족인 거죠. 
당연히 어떻겠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엄청난 눈에 가시겠죠.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을 사실상 연금시켜버립니다. 


그러다가 1919년을 맞아요. 1919년에 무슨 일이 있었죠. 
3.1운동이 있었죠. 3.1운동이 발발한 다음에 만들어지는 단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위치앙을 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고 해요. 
조금 어떻게 이거 역사를 조금 아시는 분들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위 임시정부가 주장했었던 건 공화대거든요. 
물론 지금은 우리가 지향하는 게 민주공화정이지만 나라가 망하는데 도장 찍은 사람들은 조선 황실 인사들이었거든요. 
근데 조선 황실 인사가 독립을 원한다 세계인들이 봤을 때는 굉장히 상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을 망명을 시키려고 지금의 신의주까지 데고 와요 신의주에서 그 철도를 건너서 단둥에서 잡혔다. 
일본에게 잡혀서 결국은 그게 무산되고 거의 이제 활동을 못하신 상태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는 한국전쟁까지 겪으세요. 
고종의 아들 중에 한국전쟁을 겪은 유일한 사람이에요. 


14후퇴 때 밑으로 피난까지 가세요. 
근데 그때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때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지병이 악화되셔가지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친왕은 그만큼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었던 왕이었다.


그 정도 기억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 박형주 덕형주 의원은 출생이 조금 들으시면은 의아하신 분들도 있어요. 
천구십이년생이거든요. 59세에 얻은 완전 늦둥이 당연히 그러다 보니까 엄청난 기쁨을 받습니다.
이 덕혜옹주 교육시키려고 황실에 이 나라가 망한 이 상황에서도 유치원을 만들어 덕수궁에다가 유치원을 만들어줄 정도로 덕수궁의 꽃이었답니다. 


별명이 근데 이 사람이 나라가 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교육을 받게 되거든요. 
여자 학습원이라고 하는 덕수궁에서 금지옥엽 자랐었던 거에 비해서는 평민 같은 평민 평민 뭐 그렇게 느껴졌겠죠. 
본인은 그러다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정신이 이상해집니다. 


결정적으로 정신이 확
이상해지는 게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덕혜옹주는 자기도 아버지처럼 독살당할 거다라는 망상에 빠집니다.
그런 일설이 있었어요. 이건 이거 이따가 제가 자세하게 설명드리고 일 텐데 일본이 죽일 거다라고 하는 공포심에 휩싸이면서 처음에는 보온병에 물을 담아 다니고 내가 다른 내 물이 아니면 함부로 먹지 않겠다. 
점점 심해지는 거죠. 결국은 조현병 진단을 받습니다.


조현병이 조금 호전됐을 때 대마도에 있었던 백작 소 다케유키라고 하는 그 백작이랑 결혼까지 해버려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는데 점점점 조현병 증상이 심해지다 보니까 남편도 더 이상 커버를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죠.


따님 분이 한 분 있는데 아마 이분의 죽음도 조현병을 심각하게 하는 데 좀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빨리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실종이 돼요. 
정신이 더 안 지어지고 정신병원에 결국은 입원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제 해방 이후에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 시기가 돼서야 그때서야 돌아와서 창덕궁 나선 유일하게 조선 왕실이 갖고 있었던 그 집에 머무시다가 80에 돌아왔어요.
그래서 왕가는 이렇게 해서 이제 맥이 끊기게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지금부터 설명할 거는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이라 조금 씁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일단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관심을 가졌었던 청나라가 일본이 승리를 하게 되면서 아웃이 되는 이제 조선에 관심 있는 나라는 일본만이 남아 있을 걸로 생각이 됐었는데 러시아가 동진을 하는 시점이었어요. 


이때는 명성황후와
고종이 일종의 일체가 되어서 정치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들이 선택하는 세력이 러시아였던 겁니다. 
그래서 정부 요직에 친러 세력들이 조금씩 조금씩 앉게 돼요. 
그러다 보니까 일본 입장에서는 우리 전쟁 이거 가지고 이제 거의 다 끝났는데 갑자기 러시아 세력들이 막 들어오네 심지어 대표적인 당시에 친일파였던 박영효가 실각을 하거든요. 


얘가 일본에 넘어가서 이런 보고를 합니다.
나를 자른 건 명성황후고 명성황후가 친일파 지금 친일 세력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보고를 하게 돼요. 
일본에 그때 조선으로 와 있었던 미우라 공사 그 유명한 미우라 공사가 자객팀을 짭니다. 
일본 낭인들을 동원해서 낭인이 뭐예요. 


일본 깡패들입니다. 일본 깡패들을 동원해가지고 천팔백구십오 년 시월에 새벽에 담을 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게 좀 안타까운 거죠.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았고 일부는 동조하기도 했고요 명성황후에 대한 원성도 원성이고 당시 근대화를 어느 방향으로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간의 의견들도 다 다른 상황이었고 어떻게 보면 휘뚜루 맛두로 시해가 돼버리는 거예요. 


좀 안타까운 일인 거죠. 그게 바로 을미사람
시해를 하고 난 다음에는 그냥 그 자리에서 앞에서 시체를 태웠다고 전해져요. 
시신 수습도 제대로 못했던 거죠. 구조가 진짜 이 사람이 제정신이었을까 과연 가장 옆에서 정치적 파트너로서 있었던 중전을 잃어버린 거니까 엄청난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종이 선택을 하는 게 뭐냐면
경복궁에서 그냥 정보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버리는 게 아관파천입니다. 
기댈 수 있는 데가 러시아 발고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도 어떻게 보면 조금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한데 당시에 조선한테 관심 있는 열광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조선을 유일하게 탐냈었던 나라가 강하게 탐냈었던 나라들이 청나라 일본 러시아였었고 청나라는 아까 청일전쟁으로 끝이 났으니까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러시아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로 아간 파천을 단행하게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시점이 됐을 때 황궁을 해야겠다라고 하는 거를 조금씩 조금씩 의지를 표명을 해요.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덕수궁으로 가게 됐었던 이유는 명확해요. 


왜냐면 그 주변에 다양한 나라의 공사관들이 있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그냥 내리막길로 쭉 내려가면 바로 덕수이거든요. 
중간에 미국 공사관 있고 그 옆에 뭐 프랑스 영국 공사관이 다 있는
여기 덕수궁으로 내가 환공을 해야겠다라고 결정했을 때는 고종이 앞으로 이끌어 나갈 국정운영의 방향성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외교를 통해서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어떤 위치를 확고하게 하겠다라고 하면서 만든 나라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되는 겁니다. 


대한제국 선포를 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 나름대로의 근대화 개혁을 하겠다 라고 하는 게 이제 광무개혁
시험에 잘 안 나오죠 왜 안 나오느냐 제대로 한 게 없기 때문이에요. 


사실상 고종이 하는 일이 뭐냐면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일을 합니다. 
석조전 짓고 커피 마시고 사치를 엄청나게 차 비싼 거 많이 팝니다. 
차 모으고 구형 구나 하나 사 오고 이렇게 좀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한 정책들을 하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러일 전쟁이고 이게 천구백5 년에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는 거죠.


청일전쟁 러일 전쟁 둘 다 한반도에서 싸움 동해 바다에서 어떻게 러시아 이게 굉장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때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인정해 줍니다. 


마지막까지 뭔가 결정하지 않았었던 미국까지 이제 결정을 한 거죠. 
왜 필리핀을 우리가 장악하겠다라고 하는 걸 일본한테 허락을 받고 일본도 마찬가지로 조선은 그럼 우리가
아 사실상의 식민지 천구백오년에 일사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거죠. 


천구백오년에 일사조약을 맺었을 때 한국은 식민지화가 이미 된 거다 라고 보셔도 무방한 거죠. 
일사조약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랑 조약을 맺거나 에프티에이 같은 거 못 맺는 거죠. 
요 조약을 맺게 되는 데가 중명전 거기에서 흔히 얘기하는 을사오적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사실 그 내각 수장들이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장관들 근데 이제 중요한 건 그러면 고종은 그때 뭐 했냐 을사조약 때
러인 하자가 이 형도 어떻게
그렇죠 1번은 쫄아 있었다. 그게 맞는 말이고요 두 번째는 자기가 직접 가서 찍는 게 치욕적일 거라는 거를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룹니다. 을사조약 당일에 내가 인후통이 있어서 감기에 걸려서 못 나가니까 한번 니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하면 좋겠어 정말 이런 식으로 말을 하거든요. 
그 책임을 미뤄버린 거죠. 이완용은 그 말만 듣고 나와서 사실상 고정이 허락했으니 도장 찍읍시다 라고 해서 도장을 찍게 되는 게 의사
그래서 을사조약이 체결이 되고 통감이 오게 되죠. 
초대 통감이 그 유명한 이토 히로봉이 그렇게 해서 을사조약이 체결이 된 이후에 사실상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거죠. 
거의 대부분의 일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맡아서 국정 운영을 하게 되는 거구요. 
그래서 이완용과 이토이로 구미가 짝짝꿍이 그렇게 잘 맞았어요. 
서로 너무 좋아 서로 너무 좋아했거든요. 
참고로 이완용은 일본어를 죽을 때까지 못 했습니다.
어떻게 말이 통하지 영어로 이완영은 처음에는 친미
이완용은 대표적인 침리파입니다. 천구백오년에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다음에 넘어가요 그 이전까지는 강력한 침리파입니다. 
이때 이 년간의 이 짝짝꿍이 천구백 7년인 흔히 얘기하는 한일 신협약 이때 군권이 넘어가죠. 
군대가 해산되고 일본 군대가 들어오게 되는 거죠. 
이때 고종이 퇴위를 당하게 됩니다.
왜냐 고종이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나 이렇게까지 뺏길 줄 몰랐는데 그러다 보니까 1907년 무렵에 뭔가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헤이그 특사 우리 일사조약 맺은 거 무효예요. 
우리가 맺으려고 했었던 거 아니에요를 하려고 했었던 거죠. 
권리잖아요. 다들 아시는 것처럼 그러다 보니까 일본 쪽에서 강제로 물러나라 라고 해서 태위를 강제로 시키고 순종에게 양위를 하게 되고
그렇게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게 되고
덕수궁
이태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19년에 갑자기 공식 사인은 내일혈로 죽었다라고 발표를 하는데 이때 당시에 소문이 납니다. 
독살이다 고종이 독살 당한 거
식혜를 먹고
고종이 식혜를 엄청 좋아해서 하루에 한 장씩 식혜를 꼭 먹었대요 그때 당시에 윤치호 일기나 이런 데 보면
이 식혜를
먹었는데 갑자기 몸이 너무 부어서 원래 입던 바지가 안 맞을 정도로 몸이 너무 부었다는 거죠. 
그러고 난 다음에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이게 소문이 나요. 이거는 사실관계는 확인된 바가 없어요. 
실제로 언론 당시 언론 기사에까지 뜰 정도로 이 소문은 좀 일파만파 퍼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인들 당시에 조선인들 조선인들한테 고종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지금 저희가 상상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감정일 수 있거든요. 왜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여전히 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라고 하는 심적인 가까움 상징적인 존재였던 고종이 죽었다라고 했을 때 조선인들이 갑자기 흥분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사건이 삼일 운동이 되는 삼일 운동은 이게 고종의 장례식이랑 원래 겹쳐서 일어나려고 했었던 거예요.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거죠.
고종의 삶은 파란 만장 했죠. 파란만장 했고 그가 황제일 때 나라가 망했잖아요. 
그거는 좀 엄격한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도 맞죠.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이 사람 개인의 인생을 놓고 보면 굉장히 안타까운 것도 많아요. 
그래서 여전히 학계에서도 논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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