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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브라질의 역사와 탄생

by 로이인랑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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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큰 강부터 드넓은 대평원까지 밀림 속의 원주민 마을부터 마천루로 둘러싸인 대도시까지 로마 카톨릭 사제들부터 도복을 입은 주지대로까지 초거대 달동네부터 지구 최대의 축제까지 남반구 최대의 대국 브라질에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수많은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같은 나라들이 21세기의 대표적인 대국 라인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대열에 당당히 어깨를 맞대는 잠재력 넘치는 나라가 바로 브라질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영토 이에 버금가는 세계 7위의 인구를 보유한 명실상부 대국입니다. 


남미의 미국이라고까지 불리는 브라질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브라질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과 내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이제 약 500년 그 체급에 비해서는 상당히 늦은 축에 속하죠. 
브라질의 역사는 바다를 건너온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에스파냐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남아메리카 어쩌다 유독 브라질만 포르투갈인들의 무대가 되었던 걸까요. 


포르투갈은 대항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

주역이었던 만큼 세계 지도에 대고 줄 그어버리는 흉악한 전통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1400년대 말 인도 항로를 발견해 개꿀을 빨기 시작하면서 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교황에게 독점권을 인정받고 선 넘어오지 말라며 큰소리 쳤던 건데요. 
까나리아 제도를 기준으로 가로선을 그어버린 알카소바스 조약이 글씨 초 라이벌인 에스파냐가 이 조약을 우회해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에는 대서양 한복판에 새로 선을 그어서 아예 동쪽으로 못 오게 차단해버리니 이게 그 유명한 토르데시아스 조약입니다. 

 

표면상 아메리카는 에스파냐 거 하고 인도는 포르투갈 거 하자는 거죠.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이 조약으로부터 6년 뒤인 1500년경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알바레스 까브라이 희망봉까지 남아
최적의 항로를 찾다가 너무 멀리 가는 바람에 오늘날의 브라질 동부 해안을 공식적으로 발견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속하긴 하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 기준으로 포르투갈 영토 포르투갈은 여기에 정착지를 만들고 보급기지로 사용하며 신대륙에까지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죠. 


공식적인 발견은 토르데시야스 조약 이후인 천오백 년이었지만 사실 포르투갈 선원들이 훨씬 이전부터 존재를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 정부는 이걸 모른 척한 채 최대한 서쪽으로 기준선을 협상 조약 체결 이후 우연히 발견한 척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포르투갈인들이 거대한 범선을 타고 등장한 시점 이곳에는 서로 전쟁과 인신 공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석기 시대 수준의 부족 집단들이 1천 명 이하의 작은 단위로 여기저기 고립되어 있는 정그릴 뿐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건 뚜삐족이였는데 국가 체제 것도 없었고 뭐 보물 같은 거 뜯어낼 것도 없었어요. 
심지어 해안가 대부분이 절벽이라서 항구를 만들거나 농사 짓기 어려웠습니다. 


보물도 없는 원시 밀림에 해안 절벽까지 개별로 때문에 포르투갈은 해안에서부터 위도별로 구획을 설정한 뒤 총독들한테 알아서 내륙까지 탐험 좀 해보라고 던져버린 돈 굴러오는 인도 항로에만 집중하기로 해요. 


그런데 이게 웬걸 밀림 속에서 바우 브라질이라고 불리는 고급진 나무가 대량으로 발견 이게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면서

슬슬 본국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우 브라질에서 이름을 따와 이곳을 브라질 총독부라고 명명한 뒤 북동부 해안 사우바도르에 식민지 본부를 설치했어요. 


그러나 바다 건너 오지까지 찾아온 선원들 다 합쳐보아야 한 줌의 남자들밖에 없었고 이 사람들은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강제로 나무를 캐게 만들었습니다.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포르투갈 인들의 현지처로 만들었어 혼혈아를 낳았어요.

 

이런 혼혈 후손들을 마멜루구라고 불렀는데 질병에 면역이 없는 순혈 원주민들이 죽어 나가면서 브라질 인구와 노동력은 서서히 마멜루구들로 대체되어 갔죠. 


그러나 무분별한 벌채로 바우 브라질도 점점 고갈되어 갔습니다. 


밀림 지대를 어떻게 더 뽑아 먹을까 생각하던 포르투갈은 여기다가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어요. 
뚜삐족들에게 배운 대로 밀림에 불을 지르고 북동부 해안을 대농장으로 도배해 버렸죠. 


그런데 이쯤 되니까 뚜삐족이나 마멜 루구들만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더 많은 노동력 그러니까 노예가 필요해졌어요. 사탕수수 농업 자체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들한테 어깨 너머로 배운 거였거든요. 


근데 또 아랍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원조란 말이죠. 


안 좋은 건 쉽게 배운다고 포르투갈인들은 아랍인들이 하던 걸 더 악랄하게 발전시켜서 대서양을 왕복하는 대규모 노예무역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바탕으로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업은 대박을 치고 수많은 인종들이 혼합되고 갈려 나가면서 특유의 브라질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1580년 포르투갈 왕이 아들을 못 낳고 죽어버리면서 먼 친척이었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 위까지 겸임해버리게 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른바 이베리아 연합 두 나라는 이후 수십 년간 애매하게 같은 나라처럼 돌아가게 돼요. 


문제는 이 때문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경계선이 흐지부지돼 버렸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틈타 서쪽으로 탐험을 나가는 포르투갈인들이 생기고 이 사람들은 포르투갈 깃발을 걸고 다녔다고 해서 방데이란치라고 불렸죠.

주로 상파울루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계 백인들로서 원주민 사냥에 열을 올렸는데 이 사람들이 뻥튀기 시켜 놓은 영역이 대충 오늘날 브라질의 국경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 본토에서 60여 년 만에 독립전쟁이 발발 다시 분리되게 되는데요. 
독립하고 나니까 세상이 많이 바뀌었네 포르투갈 최대 돈줄이었던 인도양이 네덜란드에 탈탈 털려버린 상태였고 브라질에서도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깔짝 대면서 사탕수수 산업을 넘보고 있었습니다. 


페르남 북부 지방을 점령한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필사적으로 몰아내지만 밀림의 파괴 때문에 가뭄이 들면서 이렇게 지켜낸 사탕수수 지대도 점점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 같은 나라들이 카리브해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면서 브라질 사탕수수는 완전히 경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뭐라도 새로운 걸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다음 타자로 낙점된 게 바로 고무 아마존 강 중류의 정착지를 건설해서 세계 유일의 고무 수출 거점으로 만들었죠. 


아메리카의 특산물인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아직 17세기 말 고무의 사용처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라 브라질 식민지를 캐리할 결정적인 한방이 될 수
없었어요. 이제 남은 건 기도 메타뿐 결국 포르투갈도 에스파니아처럼 그냥 금광이나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방데이란 치들이 라질 내륙 지방을 쭉 스캔하면서 땅을 파고 다닌 끝에 1701년 중남부 내륙에서 금광이 발견 기적적으로 부활에 성공한 브라질 식민지에는 브라질판 골드 러쉬가 시작되죠

황폐화된 북동부 해안 지방의 인구가 금을 찾아 내륙으로 들어가고 금광과 가까운 남부 해안에는 새로운 이민자들이 정착합니다. 
면서 인구도 늘어났습니다. 히우지 자네 이류도 이때 브라질 식민지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발전하기 시작했고요 하지만 금은 언젠가 고갈되기 마련 뭔가 오랫동안 꾸준히 해 먹을 만한 신성장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18세기 후반 이 상황을 타개할 개사기 아이템이 도입되니

그것이 바로 커피 열대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커피야말로 브라질 다 심으면 딱이었습니다. 
금광에 이어 커피 농장들까지 들어서면서 브라질 식민지는 엄청난 돈을 벌기 시작 경제의 중심지도 상파울루와 같은 남부 지방으로 완전히 옮겨

식민지가 발전하면 뭐다 슬슬 독립각을 본다. 
브라질의 대농장 지주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왕처럼 행세하고 있었는데 십팔 세기 후반이면 윗동네에서 미국이 독립했을 때죠 여기에 큰 자극을 받습니다. 
자꾸 세금 더 내라 그러고 식민지 출신이라며 차별이나 하고 미국처럼 독립하고 싶었어요. 
결국은 이런 대지주 세력들을 중심으로 브라질 공화국을 만들자

반란이 일어나는데 안타깝게도 실패 반란의 주동자인 찌라덴치스가 공개 처형 당하면서 찌그러지게 되죠. 
하지만 혁명의 기운이 브라질로만 간 건 아니죠. 
이게 유럽 본토까지 흘러 들어가 나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천칠백팔십구 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그 십수 년의 피바람 끝에 나폴레옹이 등장해서 전 유럽과 맞장을 뜨기 시작한 거예요.

후발 주자들한테 따라잡혀서 2등 열강으로 전락하고 영국한테 빌 붙으면서 연명하고 있던 포르투갈 식민지 반란 겨우 진압해 놨더니 이번엔 외국 혁명군이 문 부수고 들어오네요. 
그러더니 대륙 봉쇄해야 되니까 영국이랑 당장 절교하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 상황 이미 유럽 공식 퇴물이었던 포르투갈의 주왕 6세는 왕족과

귀족들을 데리고 역사적인 식민지 빤스런을 시전합니다. 
브라질의 히우지자네이루로 수도를 옮기고 떼거지로 도망쳐 온 거예요. 
인구나 영토는 일찍이 역전했고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본토와 동급이 돼버리니 자치권과 발언권도 수직 상승 브라질을 막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습니다.

1821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주왕 6세는 아들 페드루 1세에게 브라질을 맡긴 뒤 리스보아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포르투갈 의회가 태세 전환해서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려고 하네 겨우 1년 뒤인 1822년 브라질 의회는 페드루 일세를 황제로 옹립하고 브라질 제국을 선언 잠시 동안 브라질 포르투갈 연합왕국이 성립돼

포르투갈 왕국과 브라질 제국이 한 왕실 아래에 동등하게 결합한 상태가 돼요. 
그러나 이것도 불만이었던 브라질 현지 세력들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개시하고 더 이상 막을 힘이 없었던 포르투갈은 3년간의 전쟁 끝에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 그렇게 천팔백이십육 년 의회가 소집되면서 입헌군주국으로 독립 브라질 제국이 정식으로 출범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시작은 험난했습니다. 바로 그 해부터 안팎으로 온갖 난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일단 남부의 시스플라티나 지역이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로 들어가겠다며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이를 막기 위해 아르헨티나와 영혼의 마다이를 깎지만 패배 시스플라티나는 우르과이로 독립하고 브라질은 수많은 병력을 잃어버려요. 
이 와중에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터집니다. 
페드루 1세의 아버지였던

주왕 육세가 죽으면서 페드루 일세가 포르투갈 왕위까지 겸하게 된 거예요. 
브라질 국내에는 겨우 독립했는데 또 합체하냐라며 험악한 여론이 형성되고 페드루 1세는 5살 먹은 아들 페드루 2세에게 브라질 황위를 물려준 뒤 그냥 포르투갈로 빤스런 해 이제 막 독립했는데 전쟁도 패배하고 황제는 다섯 살 국내 정치가 개판이 납니다. 
장관들이 섭정을 맡는 동안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10년 넘게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어요. 
이 혼란은 1840년 헤드루 2세가 25살이 되어 정식으로 친정을 수습됐습니다. 
커피 산업을 부흥시키고 유럽과 중동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며 경제 정책도 정비했죠. 
그러던 1864년 옆나라 파라고 아이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며 전쟁을 일으키는데요. 
불과 40년 전에 전쟁을 벌였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우르과이까지 힘을 합쳐 반격을 가하고 결국 승리에 이 참에 영토까지 뜯어 먹으면서 페드루 이세의 인기와 브라질 국내 분위기는 더욱 상승세를 탑니다. 
이제 좀 나라다운 나라가 된 브라질 제국 그러나 삼백 년 넘게 축적되어 온 사회의 불균형이 그 미래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당시 브라질은 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포르투갈기의 대지주 가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원주민 혼혈 흑인 노예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가는 극히 양극화된 사회였습니다. 
지금도 비슷하다는 건 함정 비슷한 시기 독립해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랑 비교하자면 시작부터 꼬여 있었는데요.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소규모 자영농으로 정착한 미국인들과는 다르게 브라질에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으로부터 수직적으로 이어진 대기업 사원 같은 거였어요. 
때문에 식민 초기부터 중앙집권적이고 강압적인 식민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노예든 원주민이든 일단 개종시키고 혼혈시키고 노동시키면서 각각이 하나의 봉건 영지나 마찬가지 수직적인 대농장 체제가 들어섰고 미국과 같은 자체적인 산업 역량이 자라날 수 없는 후진적 사회가 자리 잡게 됐던 거죠.

당연히 독립을 주도한 세력들도 결국 이런 포르투갈기의 대주주 세력들이었습니다. 
국민들의 삶은 그냥 식민지 시절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고요 다행히 2대 황제였던 페드루 2세는 상당히 개혁적이고 통찰력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지주 세력을 억눌러서 중앙집권을 강화 그다음으로는 1888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지되고 있던 브라질의 노예제까지 폐지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해서 산업 구조 자체를 재편하려고 했는데 이에 반발한 대주주 세력 군부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좌절되게 되죠. 
노예제 폐지 일 년 뒤인 천팔백팔십구년 쿠데타의 주모자였던 데우도르다 본세카 장군이 페드루 이세를 폐위시키고 제 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황위에 미련이 없었던 페드루 이세는 순순히 브라질을 떠났고

브라질 제국은 브라질 합충공화국으로 재탄생하여 20세기를 맞게 됐죠. 
커피 산업이 계속 성장하고 자동차 같은 신기술들로 인해 고무의 수요도 많아졌습니다. 
거기다 중남부 지방에서 다양한 지하자원까지 개발되면서 브라질 경제는 계속해서 순항했어요. 
유럽의 부유한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남부 평원지대에서

낙농업이 시작됐고 저 멀리 태평양 건너 일본에서까지 이민자들이 들어오면 노동력을 채우는 등 20세기 초까지 브라질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대농장과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한 경제는 오래 갈 수 없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과 문맹 상태에서

살고 있었어요. 정치는 말만 민주주의지 사실상 대주주 가문들의 입김에 휩쓸 귀족 공화제였는데 결국 천구백삼십칠년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 독재가 시작됐고 이게 2차 대전까지 지속됐죠 1960년대 이후로는 내륙의 행정수도 브라질리아를 만들어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다시 늘어선 군사 정권 치하에서 한때 브라질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지만 이런 호황은 70년대의 오일 쇼크 때문에 금방 사그라들었고 이후로 브라질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 부정 부패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체급은 무시 못하죠. 
21세기 들어 브라질은 일명 브릭스라고 불리는 신흥 경제대국 라인에 올라 남아메리카 지역의 맹주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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